♧ 북받친밭
도랑물 해자를 두른 절벽 위 분지에서
훈련 잘된 초병 같은 청미래덩굴을 보네
전쟁이 끝났단 소식
아직 듣지 못한 걸까
사기그릇 조각들이 풀숲에 몸을 숨기고
사람의 자취마저 땅에 묻힌 산속 빈터
무너진 움막 돌담만
옛 한때를 증언하네
바람조차 들지 않는 이 깊은 숲에 들어
단 한 번 열매 맺고 말라 죽는 조릿대처럼
결연히 목숨과 바꾼
낡삭은 깃발 하나
온대성 초목들이 지난 상처 기워가고
선불 맞은 자리마다 초록 도장 찍는 시월
봄볕에 몸을 푼 섬이
말문을 트고 있네
♧ 영하의 여름
주인 잃은 초집 몇 채 불에 탄 그날 이후
마을 안길 올레마다 금줄이 내걸렸다
까마귀 울음소리가
총소리에 묻혔다
돋을볕 등에 지고 군인들이 다녀가면
어스름에 몸을 숨긴 산사람이 찾아왔다
밤과 낮 경계를 따라
핏빛 노을이 번졌다
추깃물에 젖은 밭은 모른 채 버려둬도
들나물과 고구마가 절로 절로 자라났다
굶어도 그 밭엣것을
캐는 이는 없었다
한 줄기 바람에도 목덜미가 서늘해져
이름이 불릴 때면 소름이 돋는 날들
개들도 눈만 굴리며
입을 굳게 닫았다
♧ 조간대
중산간 마을들은 조간대가 되어 갔다
하루 두 번 어김없이 밀썰물 갈마들 듯
태양의 걸음을 따라 달라지던 발소리
노을빛 스러지면 산 그림자 내려왔다
씨감자 한 톨까지 자루에 쓸어 담곤
사내란 사내는 모두 산으로 데려갔다
어둑발이 물러서면 불길이 치솟았다
구들을 들어 엎고 마루 밑도 들쑤시며
초집에 성냥을 그어 태우던 밤의 자취
이름까지 지워진 채 터만 남은 마을에는
무너진 돌담 위로 억새꽃이 흐드러지고
아련한 파도 소리만 소문처럼 떠돌았다
*임채성 시조집 『메께라』 (고요아침, 20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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