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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계간 제주작가 가을호의 시(2)

by 김창집1 2023. 10. 24.

 

 

푸르름이 눈부신 김원욱

 

 

꽃잎 흐드러진 봄날

잠에서 깨어

내 안 광막한 천계를 들여다보다가

가파도 청보리밭

물굽이에 묻혀 꿈을 꾸던

먼 어둠의 끝자락

푸르름이 환한

그날처럼 그리워지고

출렁출렁

어우러져서 넘실대자고

살아 있으므로 눈이 부신

오늘 밤

나는 누구의 뒤란에서 일렁일까

 

 

 

 

상사화 김항신

 

 

무릇, 이맘때면

당신이 서 있습니다

 

창을 열면

당신 모습 닿을 듯하다

까마득해서

 

내가 가면

그대는 떠나고

그대는 오고

 

창을 열면

꽃무릇, 당신은 없고

내가 그 곳에 서 있습니다

닿을 듯 보일 듯하다

일 년이면 빈자리에

 

모란(母蘭)

동백이 그리움만 쌓입니다

 

 

 

 

다이소에서 김혜연

   -캐스트 어웨이(castaway)*

 

 

나의 윌슨,

오늘의 빈 오후가 결국

기억의 조류를 견디지 못해 난파되었어

내 소소한 오늘의 조각들

산호색의 새벽 팥색의 아침 회적색의 오후

분명 옅어지는 붉음이었는데

진홍색의 핏자국은 지울 수 없나 봐

나의 윌슨,

매일의 각질들이 쌓여 있는 여기

실패를 숨기기 좋은 진열 앞에서

파랑의 무인도를 상상해

진지한 다짐들이 노랑의 햇살에 녹아내려도 좋은

썩지 않은 외로움들이 도리어 숨은 보물찾기라고 좋을

결국 내가 너의 것이지

네가 내 것이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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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스트 어웨이(castaway) : 2001년 개봉 영화

 

 

 

 

계산서옥도* - 서안나

 

 

한발 오르면 떠나는 자의 세계요

내려서면 눈 감은 자의 세계라

 

방문 열고

물가를 바라보는

사람

 

황포 돛대 올려 떠나는

정인이

물결에 두고 간

먼 마음을

먼지 낀 흐린 눈빛으로

읽고 있네

 

능수는 휘어져

뱃전을 붙잡고

바람은 불타올라

봄날을 부수는데

 

당신 알고 있었나

내 눈 속에 걸어 들어와

남겨놓은 불탄 자리

 

우리는 사랑할 때

이미 이별의 호사를 누렸으니

 

방문을 닫으면

정인을 먼 거리에 앉히는

옛사람의

젖은 환대를 알 것도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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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겸재 정선, 계산서옥도溪山書屋圖

비단에 수묵담채, 59.5×37, 18세기

 

 

 

 

화해의 탑 양동림

 

 

바람 불면 바람으로

비 오면 비 맞으며

강정에서 성산에서

평화를 위해 외치다 백발이 되고

힘센 이들이 힘없는 사람들에게

함부로 하지 말라고 어깨 결어 같이 목책이 되고

폭력에는 목석이 되어 항거하는 주민들과

같이 고락을 나누는 신부님의 모습이

잠든 이들을 지키는 동자석처럼 우두커니 서서

바람과 이야기하고 있는 화해의 탑으로 오버랩된다

황사평이 노을에 물들어 가고 있다

 

 

                * 계간 제주작가2023년 가을호(통권8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