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약꽃 안부
비행기 배꼽자리 작약을 심어놓고
꽃을 따야 한다면서 끝내 따지는 않고
잔칫상 차려놓은 듯 사월마당이 북적였다
언제든 보낼 거라 짐작이야 했지만
‘어머니 아버지 제사는 이제 안 지낼 거다’
단번에 확, 피어버린 문장
감당할 수 없었다
그 문장 빠져나오다 마주친 뻐꾸기 울음
한가득 그러안고 산소 곁을 서성인다
봄밤은 어디로 가나
갈 데 없는 나를 두고
♧ 소리를 보다
수업 중에 자꾸만 걸려오는 어머니 전화
몇 번이나 대답해도 귀가 먹어 막막하고
목소리 크게 내지 못해 나는 또 먹먹하고
보청기 주파수는 어디로 향한 걸까
부재중 문자를 따라 한달음 달려가면
“일 없다, 밥이나 먹자”
이 말 저 말 궁굴리는데
“안 들린다면서요?”
“지금은 들려요?”
저녁밥 먹다 말고 얼굴만 빤히 보다가
순순히 고백하신다
“입 모양으로 다 알주”
♧ 유품보고서
한낱 유품이란 매미 허물 같은 걸까
껍질만 벗어놓고 황급히 뜨신 그 길
어머니 놓친 올레길
복작복작 첫 제삿날
어쩌라고 씨고구마 장롱 속에 남겼을까
어머니를 모시듯 내 집으로 들고 와
수반에 물 한 사발도
같이 올려놓는다
썩으면 썩는 대로 내다 버릴 참이었는데
잔소리 삐죽삐죽 잔소름 돋는 새순
제상에 무릎 끓은 나도
어쩌면 외로운 유품
♧ 달빛 봉봉
고등어는 ‘고등어’ 자리돔은 그냥 ‘자리’
하고 많은 생선 중에 ‘옥돔’만 생선이랬지
먼 바다 푸들거리던 당일바리 ‘옥돔’만
육지에선 명절 때 조기도 쓴다지만
‘나 죽으면 제상에 생선은 올려도라’
부탁도 빈말하듯이 바람결에 흘리셨지
이제는 제사 명절 한 번에 치르자는데
어머닌 따로 안 차려 섭섭하다 하실 건가
생선이 마르던 옥상엔
꾸들꾸들 달빛 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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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득하다’의 제주어.
♧ 편백나무에 대한 예의
이월에 눈 내린다
편백나무에 함박함박
뚝! 가지 부러지는 소리 이따금 들려오면
아버지 마른기침이 울타리 돌아 나오고
남원과 조천 사이 길이 새로 나면서
옛집이 헐리고 나무들 잘려나가고
그 많던 편백나무는 궤짝 하나로 내게 왔다
유산에 대한 예의는 그 안쪽을 살피는 일
물걸레질 한번에도 아버지 냄새 흘러넘쳐
그 안에 영농일기장
내 습작노트를 넣어둔다
* 김영순 시집 『밥 먹고 더 울기로 했다』(시인동네 시인선 215, 202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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