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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374

김영순 시조집 '밥 먹고 더 울기로 했다'의 시(5) ♧ 동백과 고구마 가을 햇살 팽팽하니 어머니 일 나간다 중산간 마을 신흥리 동백 씨 여무는 소리 한 생애 빈 가슴 같은 바구니도 따라간다 ‘못 올라갈 나무라고 쳐다보지도 못할까’ 물끄러미 하늘만 바라보는 등 뒤에서 길 가던 현씨 삼춘이 나무를 흔들고 간다 4·3 때도 마을은 그렇게 흔들렸다 숨어 살던 하르방에게 건넨 고구마 몇 알 반세기 훌쩍 지나서 동백 씨로 떨어진다 ♧ 홀어멍돌 하나가 모자라서 전설이 된다지만 일출봉 옆 신산리에 느닷없는 돌덩이 하나 그 누가 어디를 보고 ‘홀어멍’이라 했을까 홀어멍돌 보일라, 남향집 짓지 마라 집 올레도 바꿔놓곤 ‘남근석’ 처방이라니 갯가의 땅나리꽃은 땅만 보며 피고지고 포구에 삼삼오오 둘러앉은 성게 철 절반은 파도소리 절반은 숨비소리 얼결에 혼자 된 어머니 가슴에 .. 2023. 11. 28.
김정숙 시집 '섬의 레음은 수평선 아래 있다'의 시(3) ♧ 프러포즈 태초부터 우리가 당신 사이였나요 신이 머무르는 공간을 당이라 하고 원초적 당의 주인은 신이었으니까요 할망당은 할망신 하르방당은 하르방신 어떤 사람 어떤 시간이 당신으로 맺어져 제주 섬 은밀한 곳곳 푸르른 이끼처럼 길은 끊어져도 생이 남아 있다면 당을 위한 신의 마음 신을 품은 당의 마음 하가리 할망당 앞에서 우리 당신 할래요? ♧ 이대 족대 왕대 그리고 그대 그대와 살림 궁합은 그때가 좋았었네 여한 없이 쪼개며 갓 패랭이 돼주고 등에 지고 싶으면 질구덕 들고 싶으면 들름구덕 허리 찰용이면 ᄎᆞᆯ구덕 나물 담아 ᄉᆞᆼ키구덕 애 키울 땐 애기구덕 빨래할 땐 서답구덕 나들이 갈 땐 ᄀᆞ는대구덕 뚜껑 열어 짝 맞추면 차롱이라 밥 담아 밥차롱 떡 담아 떡차롱 도시락은 동그량착 낱알 고를 땐 얼멩이 마.. 2023. 11. 26.
월간 '우리詩' 11월호의 시(4) ♧ 알들의 소란 - 김혜천 수면 아래 알들이 떠다닌다 아직 깨어나지 못한 알과 형태를 갖춘 알들이 서로를 껴안고 뒹군다 먹고 자고 여행하고 생각하고 쓰고 싸우고 화해하는 일상이 분화의 터전이다 막막하기만 한 미지의 영역도 한순간도 떠난 적 없는 매일매일이다 물이 대지의 구석구석을 흐르면서 사물을 일으키듯 알은 몸의 각 기관을 흘러 다니면서 하나의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새롭게 바뀐다 순간에 멈추어 있지 않게 하고 권력을 저항하게 하고 고정된 이름과 모든 뻔한 것들에서 도망치게 한다 끝없이 흐르고 끝없이 변화하여 선명한 모형이 되는 그리고 또다시 떠나는 ♧ 석산 – 나병춘 종이 운다 적막이 운다 오래 참았던 것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다 저런 피울음 본 적이 언제던가 서산 노을 황소보다 더 길게 범종이 운다 .. 2023. 11. 25.
김혜연 시집 '근처에 살아요'의 시(2) ♧ 삼거리 조명가게 전구 하나 주세요 마당 구석으로 돌아 들어가는 화장실 성화에 못 이겨 눈 비비며 끌려 나온 동생의 하품 네모난 창 너머의 달 조각 동그란 무릎을 닮은 밤의 말랑함을 주세요 스탠드 하나 주세요 시를 끄적이던 여백 쉽사리 잠들지 못하던 초록 간지럼 비밀의 범벅과 슬픔의 속눈썹이 깜박이던 새벽의 목덜미 그 은은함을 주세요 샹들리에를 주세요 삐걱이는 마룻바닥 위에서 흔들리는 바라보고 있노라면 빛에 중독되어 마시고 마셔도 빛으로 빈 잔을 채워야하는 빛을 마실수록 깊게 하강하는 그림자 내가 나의 가해자가 되어버리는 가장 까만 대낮의 우울을 주세요 어깨까지 젖은 날이면 뛰쳐 들어가고 싶던 어둠의 소실점 이제는 켜지지 않는 삼거리에서 내가 빈 채로 끌려 다니며 문득문득 내가 까물까물 꺼져버려요 나를.. 2023. 11. 24.
나기철 시집 '담록빛 물방울'의 시(4) ♧ 환한 날 1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은 저녁, 집으로 가는 버스가 병원 앞을 지납니다. 커브 담 위 담쟁이들 가득 수도 없이 연두색으로 돋았습니다. 그 앞 처녀들 팡팡 걷습니다. 희끄무레한 창들 앞에서. ♧ 때죽나무 꽃 별은 밤하늘에만 있는 게 아니다 절물 너나들이길 위에도 있다 무수히 종을 울리다 떨어져 더 빛나는 ♧ 과녁 정류장 처마 빗방울 하나 머리에 떨어졌다 우주 어디에서 온 화살 삼사석三射石 부근 내릴 때 마비가 풀렸다 ♧ 악력 아내의 손목은 나보다 훨씬 굵다 그 손으로 텃밭을 일구고 음식을 쓱싹쓱싹 하고 뚝딱 수리도 하고 내 손목은 얇다 힘들지 않은 책장이나 쓱쓱 넘기고 가벼운 가방을 메고 ♧ 평화양로원 2 모두 안에만 있는지 늘 멈춰 있는 가는 봄날 한 남자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노래.. 2023. 11. 23.
김영순 시집 '밥 먹고 더 울기로 했다'의 시(4) ♧ 작약꽃 안부 비행기 배꼽자리 작약을 심어놓고 꽃을 따야 한다면서 끝내 따지는 않고 잔칫상 차려놓은 듯 사월마당이 북적였다 언제든 보낼 거라 짐작이야 했지만 ‘어머니 아버지 제사는 이제 안 지낼 거다’ 단번에 확, 피어버린 문장 감당할 수 없었다 그 문장 빠져나오다 마주친 뻐꾸기 울음 한가득 그러안고 산소 곁을 서성인다 봄밤은 어디로 가나 갈 데 없는 나를 두고 ♧ 소리를 보다 수업 중에 자꾸만 걸려오는 어머니 전화 몇 번이나 대답해도 귀가 먹어 막막하고 목소리 크게 내지 못해 나는 또 먹먹하고 보청기 주파수는 어디로 향한 걸까 부재중 문자를 따라 한달음 달려가면 “일 없다, 밥이나 먹자” 이 말 저 말 궁굴리는데 “안 들린다면서요?” “지금은 들려요?” 저녁밥 먹다 말고 얼굴만 빤히 보다가 순순히 고.. 2023. 11.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