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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373

나기철 시집 '담록빛 물방울'의 시(6) ♧ 처서處暑 뒤 내내 꽂혀 있던 붉은 파라솔 아침에 옆집 담벼락에 기대 있다 거두어 집에 들여 놓았다 한라산도 불을 뿜을 때가 있었다 이젠 조용하다 ♧ 독립서점 -주인의 말 망해도 괜찮다는 생각 지금도 같다 얼마든지 망할 수 있다 근데 잘 망하고 싶다 조용히 ♧ 한숨 살아있는 문어를 사서 차 뒤에 놓고 오는데 이따금 푸우 푸우 열흘이 지나도 냉장고에서 죽은 그를 꺼내지 못한다 ♧ 자유 살면서 때때로 오는 두려움이 얼마나 두려웠으면 카잔차키스는 마지막,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외쳤을까 늦게 미룬 밥상 앞에 앉아 두려워 밀쳐둔 고기부터 씹는다 씹으면 불편한 내가 어느 시인은 익사할 뻔한 뒤 일부러 깊은 물에 몸을 던졌다 한다 ♧ 일주동로一走東路 서귀.. 2023. 12. 5.
김정숙 시집 '섬의 레음은 수평선 아래 있다'의 시(4) ♧ 범벅을 아는 당신이라면 만만한 메밀가루 한 줌으로 뭉뚱그린 끼니 범벅 중에 범벅은 식어도 괜찮은 고구마범벅 빈속으로 쑥쑥 크라며 겉과 속 다른 호박범벅 참다 참다 배고플 땐 감자 듬뿍 감자범벅 아무 생각 없을 땐 무로 쑤는 무범벅 눈물방울 보일 땐 당원 한 방울 범벅 떡도 밥도 죽도 아닌 덩어리로 배 채우며 어려 고생은 약이라고 달래시더니 아, 그게 역경이라면 오늘은 땡초범벅을 ♧ ᄒᆞ다 ᄒᆞ다 수백만 송이송이 귤꽃 터지는 오월 사나흘 밤낮 공들여 다섯 꽃잎 펼치고 가운데 노란 점 하나에 온갖 치성 들이는 봄 ᄒᆞ다 ᄒᆞ다 어느 한 잎도 아프지 말게 해줍써 ᄒᆞ다 ᄒᆞ다 눈 맞은 사름 만낭 시집 장게 보내 줍써 비ᄇᆞ름 맞당도 남앙 곱게 익게 해줍써 ♧ 오몽 예찬 오몽해사 살아진다 오몽해사 살아진다 .. 2023. 12. 2.
김혜연 시집 '근처에 살아요'의 시(3) ♧ 게슈탈트 꿈은 바늘이에요 잠든 여러 ‘나’를 밤마다 꿰매죠 조금씩 나는 ‘나’에게서 물들어요 기시감은 문양처럼 내게 새겨지죠 그러니까 나는 어제보다 조금 더 무겁고 그러니까 나는 어제보다 조금 더 훼손돼요 바늘에 끅끅 눌려 길어지는 밤 울지 않아도 돼요 꿈이 바늘인 걸요 고작 내가 짝퉁이 되어가는 것뿐인 걸요 테두리가 뭉개진 화면 눈물처럼 번진 얼굴들 부어오른 기억의 표면 애가 끊어지고 목 놓아 울고 둥둥 떠다니고 잃어버린 것이 기억이 나지 않아 손발이 묶인 내가 ‘나’를 뒤틀고 넌 무얼 바라보는 거지? 그토록 까맣게. 꿈의 각막에 선율이 쏟아져요 흑백의 음률이 발목에서 찰박이고 나는 녹아 없는 빛깔로 일렁이다 침전돼요 깨어난 나는 가슴을 쓸며 바늘을 숨겨요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는데 아직 내가 다 .. 2023. 12. 1.
월간 '우리詩' 11월호의 시(5) ♧ 풍선초의 비밀 - 한명희 풍선초의 너비를 헤아리게 된 건 지난 늦가을이었다 길게 늘어뜨린 푸른 표정의 줄기들을 고사목 주위에 걸쳐 놀 때만 해도 그저 제자리를 지키는 방식으로 알았다 한참을 들여다보니 초록의 씨방마다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을까 작은 궁금증이 찾아왔다 내 성장통이 욱신거리며 피어날 때 잘 익은 화초꽈리 하나 뚝 따서 입에 넣고 오물거려 보았던 적이 있었다 톡톡 터지던 그 분홍의 느낌이 몸속으로 천천히 퍼져나가자 딱새알만 한 가슴을 꼭꼭 숨기느라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다닌 시간의 수위가 그만 가라앉기 시작했다 풍등처럼 매단 꼬투리에 씨앗 몇 개 품어놓고 풍등초야, 너도 지금 매달린 자식들 올망졸망 가난한 저녁을 여린 손끝으로 뻗쳐나가려는 동안은 아니었느냐 ♧ 온도와 사랑 - 손창기 온도가 .. 2023. 11. 30.
나기철 시집 '담록빛 물방울'의 시(5) ♧ 별은 빛나건만 서울 갔다 온 날 집에 안 들리고 서귀포예술의전당 음악회에 가려 제주시청 앞 281번 버스 타니 작고 여위고 해맑은 서른 좀 넘었음직한 운전기사 다시 본다 한 시간 걸려 한라산 넘어 남극 수성壽星 보인다는 남성마을 내릴 때 뒤돌아 한 번 더 본다 젊은 기사여, 마흔 쉰 예순 되어도 그 눈빛 그대로이길! ♧ 235년 전 눈 감고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듣는다 전날 완성해 한 번도 연습 못한 곡 피아노 치며 지휘하는 그 기립박수 눈 뜨니 창밖 비자나무 새들 살아있다! ♧ 배경 해남 전국 시낭송 대회 때 심사위원 중 좀 젊은 시인이 오세영 원로시인으로 바뀌어졌는데, 김구슬 시인 대신 위원장 맡는 걸 고사하여 두 번째 자리에 내내 앉아 계신 걸 보았다. 근래 선생이 발표한 시를 보니 어떤 자리.. 2023. 11. 29.
김영순 시조집 '밥 먹고 더 울기로 했다'의 시(5) ♧ 동백과 고구마 가을 햇살 팽팽하니 어머니 일 나간다 중산간 마을 신흥리 동백 씨 여무는 소리 한 생애 빈 가슴 같은 바구니도 따라간다 ‘못 올라갈 나무라고 쳐다보지도 못할까’ 물끄러미 하늘만 바라보는 등 뒤에서 길 가던 현씨 삼춘이 나무를 흔들고 간다 4·3 때도 마을은 그렇게 흔들렸다 숨어 살던 하르방에게 건넨 고구마 몇 알 반세기 훌쩍 지나서 동백 씨로 떨어진다 ♧ 홀어멍돌 하나가 모자라서 전설이 된다지만 일출봉 옆 신산리에 느닷없는 돌덩이 하나 그 누가 어디를 보고 ‘홀어멍’이라 했을까 홀어멍돌 보일라, 남향집 짓지 마라 집 올레도 바꿔놓곤 ‘남근석’ 처방이라니 갯가의 땅나리꽃은 땅만 보며 피고지고 포구에 삼삼오오 둘러앉은 성게 철 절반은 파도소리 절반은 숨비소리 얼결에 혼자 된 어머니 가슴에 .. 2023. 11.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