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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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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철 유고시집 '봄날만 잘도 간다'(10) ♧ 밀감꽃 I    한라산 치마폭마다 백설의 자국으로 이리도 하안 불을 켜는가   물안개인 듯 별들이 머리 빗으며 향기 품는 하늘   햇빛 내린 언덕 아래 초가집 두서너 채 한라산을 얘기한다   섬을 비집어 온 파도 소리가 꽃술의 안쪽으로 스러지는 듯 발 벗은 담쟁이 사뿐히 꽃잎 새 위로 건너고 있다   백록담에 눈이 큰 꽃사슴 목마른 밤이면 달이 없어도 훤히 밝은 앞 냇가에 이뿐 순아 홀로 빨래질하네     ♧ 밀감 꽃 Ⅱ    고웁게 가난이 피었소 저녁 바람 스쳐오면 삐걱대는 문   떠나는 것은 가게 두고 돌아서서 쏟아지는 가난이 피었소 서귀포 창마다 등불을 켜고 허기진 빈 주낙배 돌아오면   아아, 맨살을 떼어내는 바다여 파도 소리에 꽃.. 2024. 8. 24.
김순선 시집 '어느 토요일 오후'의 시(완) ♧ 우울을 씻으러    태풍이 지다간 하늘은 며칠째 우울하다 짙은 회색 거리에는 바람이 공놀이를 하며 플라타너스 잎을 이리저리 몰고 다닌다 돌담에 담쟁이 누렇게 말라기는 골목길 돌아 바다로 간다   퀵 오토바이가 곡예를 하듯 지나가고 산책하는 사람 마라톤 하는 사람 자전거 타는 사람 낚시하는 사람 바다를 구경하는 사람 물질하는 해녀들 갯가 좌판에서 해산물을 사 먹는 사람들   하늘은 보채는 어린아이와 같이 울상이어도 해안도로는 우울을 몰아내는 따로국밥 사람들은 한 꺼풀씩 구름을 거둬간다 무거운 발걸음에도 바람꽃이 피어난다 텁텁한 입안에서는 솜사탕 같은 구름이 녹아내린다     ♧ 녹차 들깨 수제비를 먹던 날    흙길을 걷다 정자 옆에 아카시아꽃 만발하여 너도나.. 2024. 8. 23.
임채성 시조집 '메께라'의 시조(16) ♧ 송악산 까마귀     봄이면 깃을 치는 온기 없는 햿살 아래 세월의 각다귀들 까마귀가 떼로 산다 먼발치 섯알오름을 들면 날면 헤집으며   궁근 가슴 죄어오는 저 성찬의 아지랑이 유채꽃 수선화의 예비검속 눈길을 피해 추깃물 고인 연못에 검은 부리를 씻는다   배동바지 보리까락 날갯죽지 파고들 때 어디로 떠났을까, 검정 고무신의 주인들 모슬포 뱃고동 소리 한 척 폐선 깨우고   환해장성 물들이던 핏빛 놀도 잦아들면 만벵듸 백조일손百祖-孫 열어놓은 뱃길 위로 초승 빛 조각배 하나 이어도로 가고 있다     ♧ 마라도 기는 길    바다는 일주일째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다   넋 놓은 사람들의 머리채를 꺼두르며 바람은 메밀꽃 위에 악다구니를 쏟아낸다   길이란 길 죄다 .. 2024. 8. 22.
월간 '우리詩' 8월호의 시(4) ♧ 장날 - 조병기    달걀 서너 줄 들고 졸졸 어머니 따라 장터로 간다 탱자나무꽃 핀 과수원길 지나 쥐똥나무 꽃향기 나는 마을 골목길 장터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어물전, 포목점, 대장간… 길가에 앉아 잔치국수 한 사발 어머니는 생명태 한 꾸러미 나는 고무신 한 켤레 세상은 온통 내 것이라     ♧ 덩굴장미의 꿈 - 강우현    꿈꾸던 겨울이 기대어 섰던 메쉬펜스에 덕담 같은 봄을 입고 아침을 여는 덩굴장미가 있습니다   꽃잎이 하나씩 떨어지는 바닥에 민달팽이 걸음으로 자리 거두는 그늘이 있습니다   무기계약직이 첫 출근하던 날 부끄러움을 모르는 꽃이 품고 있던 벌 한 마리 꽃을 바꿔 가며 파고들던 더듬이가 볼 일을 제대로 봤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대칭인 얼굴에.. 2024. 8. 21.
김신자 시조집 '봄비에 썼던 문장은 돌아오지 않는다'(10) ♧ 시작노트 5    자주 생각하는 방향으로 내 마음을 살짝 기울인 대상을 닮아가는 모습으로 그렇게 삶은 물들게 마련이다 어느새 내게 스며든 시가 있다 내가 그 ‘다른 시’를 보았을 때 시가 물컹 좋아졌다     ♧ 삘기꽃    꽃인 줄 알았는데 먹고 싶은 껌이었다 껌인 줄 알았는데 나풀나풀 꽃이었다 입안에 질겅거리며 달콤함 느껴지는   삘기는 내게 있어 아카시아 껌이었다 오월에 어김없이 뾰족뾰족 올라와 배고픈 아이의 배를 채워주던 밥이었다   때로는 껌이 되고 때로는 밥이 되다 삥이치기 놀이로 해지는 줄 모르다가 향기만 남겨 놓은 채 홀연 꽃이 돼버리는     ♧ 다른 시를 보네    한 분은 시 잘 써서 이름이 나 나서서 이 상 저 상 챙기기 연연하고 저.. 2024. 8. 20.
김항신 시집 '연서戀書'의 시(10) ♧ 입동   1.   이렇게 오려니 어제도 그제도 그렇게 허무하게 시리던가요 마음만 먼저 나서는 저 뱃머리 몇 시쯤에 가야 가파도에 가려나 우도에 가려나 하면서 서우봉 등대에서 뱃고동 소리만 듣다 여운만 남기길 며칠이던가요     2.   이렇게 오려고 우수수 낙엽만 떨구었나 시린 마음 달래주려 난장으로 가라 했나 그 마음 씀씀이에 오늘 모처럼 단장 곱게 하여 곱디고운 이름도 몰라 성도 모른 말해줘도 모른다며 몰라도 그렇게 살라기에 나 그렇게 어여쁜 것들 칠천 원에 입양하여 다육 다육     3.   야야 고마해라 이만 혀도 된 거 아이가 가스나 하고는   그래도 그게 아니라서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산다꼬 좀 더 길게 보면 안 되나요   .. 2024. 8.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