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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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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우리詩' 11월호의 시(5) ♧ 풍선초의 비밀 - 한명희 풍선초의 너비를 헤아리게 된 건 지난 늦가을이었다 길게 늘어뜨린 푸른 표정의 줄기들을 고사목 주위에 걸쳐 놀 때만 해도 그저 제자리를 지키는 방식으로 알았다 한참을 들여다보니 초록의 씨방마다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을까 작은 궁금증이 찾아왔다 내 성장통이 욱신거리며 피어날 때 잘 익은 화초꽈리 하나 뚝 따서 입에 넣고 오물거려 보았던 적이 있었다 톡톡 터지던 그 분홍의 느낌이 몸속으로 천천히 퍼져나가자 딱새알만 한 가슴을 꼭꼭 숨기느라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다닌 시간의 수위가 그만 가라앉기 시작했다 풍등처럼 매단 꼬투리에 씨앗 몇 개 품어놓고 풍등초야, 너도 지금 매달린 자식들 올망졸망 가난한 저녁을 여린 손끝으로 뻗쳐나가려는 동안은 아니었느냐 ♧ 온도와 사랑 - 손창기 온도가 .. 2023. 11. 30.
나기철 시집 '담록빛 물방울'의 시(5) ♧ 별은 빛나건만 서울 갔다 온 날 집에 안 들리고 서귀포예술의전당 음악회에 가려 제주시청 앞 281번 버스 타니 작고 여위고 해맑은 서른 좀 넘었음직한 운전기사 다시 본다 한 시간 걸려 한라산 넘어 남극 수성壽星 보인다는 남성마을 내릴 때 뒤돌아 한 번 더 본다 젊은 기사여, 마흔 쉰 예순 되어도 그 눈빛 그대로이길! ♧ 235년 전 눈 감고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듣는다 전날 완성해 한 번도 연습 못한 곡 피아노 치며 지휘하는 그 기립박수 눈 뜨니 창밖 비자나무 새들 살아있다! ♧ 배경 해남 전국 시낭송 대회 때 심사위원 중 좀 젊은 시인이 오세영 원로시인으로 바뀌어졌는데, 김구슬 시인 대신 위원장 맡는 걸 고사하여 두 번째 자리에 내내 앉아 계신 걸 보았다. 근래 선생이 발표한 시를 보니 어떤 자리.. 2023. 11. 29.
김영순 시조집 '밥 먹고 더 울기로 했다'의 시(5) ♧ 동백과 고구마 가을 햇살 팽팽하니 어머니 일 나간다 중산간 마을 신흥리 동백 씨 여무는 소리 한 생애 빈 가슴 같은 바구니도 따라간다 ‘못 올라갈 나무라고 쳐다보지도 못할까’ 물끄러미 하늘만 바라보는 등 뒤에서 길 가던 현씨 삼춘이 나무를 흔들고 간다 4·3 때도 마을은 그렇게 흔들렸다 숨어 살던 하르방에게 건넨 고구마 몇 알 반세기 훌쩍 지나서 동백 씨로 떨어진다 ♧ 홀어멍돌 하나가 모자라서 전설이 된다지만 일출봉 옆 신산리에 느닷없는 돌덩이 하나 그 누가 어디를 보고 ‘홀어멍’이라 했을까 홀어멍돌 보일라, 남향집 짓지 마라 집 올레도 바꿔놓곤 ‘남근석’ 처방이라니 갯가의 땅나리꽃은 땅만 보며 피고지고 포구에 삼삼오오 둘러앉은 성게 철 절반은 파도소리 절반은 숨비소리 얼결에 혼자 된 어머니 가슴에 .. 2023. 11. 28.
한림읍 귀덕리 '영등할망 밭담길'(5) □ ‘영등할망 밭담길’ 이름의 유래 영등할망은 하늘에서 내려와 해상 안전과 풍요를 가져다주는 ‘바람의 신[風神]’이다. 신화(神話)에 따르면 영등할망은 2월 초하루에 제주도로 들어와 바닷가를 돌면서 해산물의 씨앗을 뿌려 풍요를 주고 농사일까지 보살핀 다음, 2월 15일에 본국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그래서 제주에서는 2월을 ‘영등달’이라 하여 해신당이 있는 대부분의 마을에서는 영등할망을 맞아 굿을 벌여 대접하고, 해녀일과 어로(漁撈)의 안전을 기원한다. 신화에는 영등할망이 2월 초하루 귀덕리 복덕개로 들어와 보름날 우도를 떠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영등굿이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고 난 뒤, 귀덕1리에서는 2013년부터 복덕개 서쪽에다 터를 잡아 신화공원을 만들고, 여러 신상(神象)들을.. 2023. 11. 27.
김정숙 시집 '섬의 레음은 수평선 아래 있다'의 시(3) ♧ 프러포즈 태초부터 우리가 당신 사이였나요 신이 머무르는 공간을 당이라 하고 원초적 당의 주인은 신이었으니까요 할망당은 할망신 하르방당은 하르방신 어떤 사람 어떤 시간이 당신으로 맺어져 제주 섬 은밀한 곳곳 푸르른 이끼처럼 길은 끊어져도 생이 남아 있다면 당을 위한 신의 마음 신을 품은 당의 마음 하가리 할망당 앞에서 우리 당신 할래요? ♧ 이대 족대 왕대 그리고 그대 그대와 살림 궁합은 그때가 좋았었네 여한 없이 쪼개며 갓 패랭이 돼주고 등에 지고 싶으면 질구덕 들고 싶으면 들름구덕 허리 찰용이면 ᄎᆞᆯ구덕 나물 담아 ᄉᆞᆼ키구덕 애 키울 땐 애기구덕 빨래할 땐 서답구덕 나들이 갈 땐 ᄀᆞ는대구덕 뚜껑 열어 짝 맞추면 차롱이라 밥 담아 밥차롱 떡 담아 떡차롱 도시락은 동그량착 낱알 고를 땐 얼멩이 마.. 2023. 11. 26.
월간 '우리詩' 11월호의 시(4) ♧ 알들의 소란 - 김혜천 수면 아래 알들이 떠다닌다 아직 깨어나지 못한 알과 형태를 갖춘 알들이 서로를 껴안고 뒹군다 먹고 자고 여행하고 생각하고 쓰고 싸우고 화해하는 일상이 분화의 터전이다 막막하기만 한 미지의 영역도 한순간도 떠난 적 없는 매일매일이다 물이 대지의 구석구석을 흐르면서 사물을 일으키듯 알은 몸의 각 기관을 흘러 다니면서 하나의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새롭게 바뀐다 순간에 멈추어 있지 않게 하고 권력을 저항하게 하고 고정된 이름과 모든 뻔한 것들에서 도망치게 한다 끝없이 흐르고 끝없이 변화하여 선명한 모형이 되는 그리고 또다시 떠나는 ♧ 석산 – 나병춘 종이 운다 적막이 운다 오래 참았던 것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다 저런 피울음 본 적이 언제던가 서산 노을 황소보다 더 길게 범종이 운다 .. 2023. 11.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