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417 김혜연 시집 '근처에 살아요'의 시(4) ♧ 파열음이 파열하며 아버지는 평생 청유를 모르셨고 어머니의 언어는 오로지 직유였다 고시원 쪽방 좁은 창 그들의 균열로 오늘을 유지하는 나는 그들의 은유 몰래 훔친 핀을 건네자 분홍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피-” 오후의 공기를 파열하던 “피-” 검기울던 운동장을 찰랑거리며 팔랑거리며 나서던 얼굴이 지워진 사랑했던 소녀 축제의 밤 불꽃과 환호가 터지면 파열음의 늪을 가득 채우는 지워진 얼굴의 분홍 입술 입술 입술들 이 밤은 가장 검음이야 너는 나의 새벽이야 다정한 직유가 나를 깨운다 파열음이 파열한다 비릿한 평화 나는 한참만에 어머니로 향하는 단축번호를 누른다 ♧ 비밀 우리의 공기는 다른 맛이었지 너는 매일 하루를 점쳤고 나는 내일을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체했지 울음을 참듯이 중력을 꾹꾹 누르듯이 너는 두.. 2023. 12. 7. '제주시조' 2023 제32호의 시조(1) -독자의 픽Pick 시조 ♧ 가을산행 - 강상돈 꺼질 수 없는 여름날이 여태까지 타고 있는 단풍잎도 따라나선 사라봉 산책길에 한 마리 직박구리가 고요를 깨고 있다 굳은살도 이런 날이면 단풍물이 드는가 타오르지 못한 꿈 가슴 깊이 품을 때 제 몸을 뜨겁게 태운 흔적 하나 보인다 듬성듬성 밟아온 아픔은 지워졌다 근육질 저 소나무 나선형으로 길을 내주고 오늘도 놀을 벗 삼아 가쁜 숨을 내젓는다 *부재호(前 제주문화예술진흥원장) ♧ 동행 – 강애심 세모와 네모가 만나 찌르고 상처 내며 보글보글 톡톡톡 부부의 긴 여정 살다가 살아지다가 술 익듯 익어간다 *현달환(뉴스N제주 편집국장) ♧ 간출여 - 강영임 숨었던 바위는 바닷물이 밀려나면 물 밖 세상으로 제 모습을 드러낸다 은밀히 옷으로 덮인 당신의 등처럼 아물고 .. 2023. 12. 6. 나기철 시집 '담록빛 물방울'의 시(6) ♧ 처서處暑 뒤 내내 꽂혀 있던 붉은 파라솔 아침에 옆집 담벼락에 기대 있다 거두어 집에 들여 놓았다 한라산도 불을 뿜을 때가 있었다 이젠 조용하다 ♧ 독립서점 -주인의 말 망해도 괜찮다는 생각 지금도 같다 얼마든지 망할 수 있다 근데 잘 망하고 싶다 조용히 ♧ 한숨 살아있는 문어를 사서 차 뒤에 놓고 오는데 이따금 푸우 푸우 열흘이 지나도 냉장고에서 죽은 그를 꺼내지 못한다 ♧ 자유 살면서 때때로 오는 두려움이 얼마나 두려웠으면 카잔차키스는 마지막,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외쳤을까 늦게 미룬 밥상 앞에 앉아 두려워 밀쳐둔 고기부터 씹는다 씹으면 불편한 내가 어느 시인은 익사할 뻔한 뒤 일부러 깊은 물에 몸을 던졌다 한다 ♧ 일주동로一走東路 서귀.. 2023. 12. 5. 한림읍 동명리 '수류천 밭담길'(6) □ 물이 좋기로 이름난 마을 명월(明月)은 예부터 물이 좋기로 유명하다. 마을이 번성하여 조선 철종 2년(1861)에 명월리, 상명리, 동명리로 나뉘었다. 이형상 목사의 ‘명월조점(明月操占)’에 명월진성 서쪽으로 ‘수류천촌(水流川村)’이 나타나는데, 이곳 밭담길 이름은 그 지명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제주시에서 291번이나 292번 버스를 타고 동명리 정류소에서 내려, 명월성로(1120)를 통해 한림중학교를 지나면 ‘동명리 콩창고(농협창고 옛 건물)’가 나타나는데, 그 앞에 출발점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그곳에서 출발하여 황룡사 입구, 명월성지, 명월교차로를 지나 동명5길과 동명7길을 거쳐 한림중앙로로 나왔다가, 동명3길을 통해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약 3.3km의 밭담길은 50분 정도가 소요된다... 2023. 12. 3. 김정숙 시집 '섬의 레음은 수평선 아래 있다'의 시(4) ♧ 범벅을 아는 당신이라면 만만한 메밀가루 한 줌으로 뭉뚱그린 끼니 범벅 중에 범벅은 식어도 괜찮은 고구마범벅 빈속으로 쑥쑥 크라며 겉과 속 다른 호박범벅 참다 참다 배고플 땐 감자 듬뿍 감자범벅 아무 생각 없을 땐 무로 쑤는 무범벅 눈물방울 보일 땐 당원 한 방울 범벅 떡도 밥도 죽도 아닌 덩어리로 배 채우며 어려 고생은 약이라고 달래시더니 아, 그게 역경이라면 오늘은 땡초범벅을 ♧ ᄒᆞ다 ᄒᆞ다 수백만 송이송이 귤꽃 터지는 오월 사나흘 밤낮 공들여 다섯 꽃잎 펼치고 가운데 노란 점 하나에 온갖 치성 들이는 봄 ᄒᆞ다 ᄒᆞ다 어느 한 잎도 아프지 말게 해줍써 ᄒᆞ다 ᄒᆞ다 눈 맞은 사름 만낭 시집 장게 보내 줍써 비ᄇᆞ름 맞당도 남앙 곱게 익게 해줍써 ♧ 오몽 예찬 오몽해사 살아진다 오몽해사 살아진다 .. 2023. 12. 2. 김혜연 시집 '근처에 살아요'의 시(3) ♧ 게슈탈트 꿈은 바늘이에요 잠든 여러 ‘나’를 밤마다 꿰매죠 조금씩 나는 ‘나’에게서 물들어요 기시감은 문양처럼 내게 새겨지죠 그러니까 나는 어제보다 조금 더 무겁고 그러니까 나는 어제보다 조금 더 훼손돼요 바늘에 끅끅 눌려 길어지는 밤 울지 않아도 돼요 꿈이 바늘인 걸요 고작 내가 짝퉁이 되어가는 것뿐인 걸요 테두리가 뭉개진 화면 눈물처럼 번진 얼굴들 부어오른 기억의 표면 애가 끊어지고 목 놓아 울고 둥둥 떠다니고 잃어버린 것이 기억이 나지 않아 손발이 묶인 내가 ‘나’를 뒤틀고 넌 무얼 바라보는 거지? 그토록 까맣게. 꿈의 각막에 선율이 쏟아져요 흑백의 음률이 발목에서 찰박이고 나는 녹아 없는 빛깔로 일렁이다 침전돼요 깨어난 나는 가슴을 쓸며 바늘을 숨겨요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는데 아직 내가 다 .. 2023. 12. 1. 이전 1 ··· 54 55 56 57 58 59 60 ··· 7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