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417 김혜연 시집 '근처에 살아요'의 시(2) ♧ 삼거리 조명가게 전구 하나 주세요 마당 구석으로 돌아 들어가는 화장실 성화에 못 이겨 눈 비비며 끌려 나온 동생의 하품 네모난 창 너머의 달 조각 동그란 무릎을 닮은 밤의 말랑함을 주세요 스탠드 하나 주세요 시를 끄적이던 여백 쉽사리 잠들지 못하던 초록 간지럼 비밀의 범벅과 슬픔의 속눈썹이 깜박이던 새벽의 목덜미 그 은은함을 주세요 샹들리에를 주세요 삐걱이는 마룻바닥 위에서 흔들리는 바라보고 있노라면 빛에 중독되어 마시고 마셔도 빛으로 빈 잔을 채워야하는 빛을 마실수록 깊게 하강하는 그림자 내가 나의 가해자가 되어버리는 가장 까만 대낮의 우울을 주세요 어깨까지 젖은 날이면 뛰쳐 들어가고 싶던 어둠의 소실점 이제는 켜지지 않는 삼거리에서 내가 빈 채로 끌려 다니며 문득문득 내가 까물까물 꺼져버려요 나를.. 2023. 11. 24. 나기철 시집 '담록빛 물방울'의 시(4) ♧ 환한 날 1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은 저녁, 집으로 가는 버스가 병원 앞을 지납니다. 커브 담 위 담쟁이들 가득 수도 없이 연두색으로 돋았습니다. 그 앞 처녀들 팡팡 걷습니다. 희끄무레한 창들 앞에서. ♧ 때죽나무 꽃 별은 밤하늘에만 있는 게 아니다 절물 너나들이길 위에도 있다 무수히 종을 울리다 떨어져 더 빛나는 ♧ 과녁 정류장 처마 빗방울 하나 머리에 떨어졌다 우주 어디에서 온 화살 삼사석三射石 부근 내릴 때 마비가 풀렸다 ♧ 악력 아내의 손목은 나보다 훨씬 굵다 그 손으로 텃밭을 일구고 음식을 쓱싹쓱싹 하고 뚝딱 수리도 하고 내 손목은 얇다 힘들지 않은 책장이나 쓱쓱 넘기고 가벼운 가방을 메고 ♧ 평화양로원 2 모두 안에만 있는지 늘 멈춰 있는 가는 봄날 한 남자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노래.. 2023. 11. 23. 김영순 시집 '밥 먹고 더 울기로 했다'의 시(4) ♧ 작약꽃 안부 비행기 배꼽자리 작약을 심어놓고 꽃을 따야 한다면서 끝내 따지는 않고 잔칫상 차려놓은 듯 사월마당이 북적였다 언제든 보낼 거라 짐작이야 했지만 ‘어머니 아버지 제사는 이제 안 지낼 거다’ 단번에 확, 피어버린 문장 감당할 수 없었다 그 문장 빠져나오다 마주친 뻐꾸기 울음 한가득 그러안고 산소 곁을 서성인다 봄밤은 어디로 가나 갈 데 없는 나를 두고 ♧ 소리를 보다 수업 중에 자꾸만 걸려오는 어머니 전화 몇 번이나 대답해도 귀가 먹어 막막하고 목소리 크게 내지 못해 나는 또 먹먹하고 보청기 주파수는 어디로 향한 걸까 부재중 문자를 따라 한달음 달려가면 “일 없다, 밥이나 먹자” 이 말 저 말 궁굴리는데 “안 들린다면서요?” “지금은 들려요?” 저녁밥 먹다 말고 얼굴만 빤히 보다가 순순히 고.. 2023. 11. 22. 성산읍 난산리 '난미밭담길'(4) □ 아직도 가기 힘든 마을 이번 취재를 위해 제주시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성산읍 난산리로 가보니, 차편이 그리 녹록하지 않다. 난산리 가려면 서귀포와 성산을 오가는 295번 버스 편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표선에서 신풍, 삼달, 신천리를 거쳐 갔다가 그 길로 되돌아오거나, 신양을 거쳐 고성리로 나와 제주시와 성산포를 오가는 버스 편으로 돌아와야 했다. 물론 성산읍 관내를 도는 버스가 있지만 복잡하고 드물다. 이번 표선민속촌으로 가는 번영로를 이용했는데, 대기시간까지 3시간이나 걸렸다. 혹 방문할 일이 있으면 승용차 이용을 권해본다. 난미밭담길이 시작되는 정류소에 내려 복지회관 입구에 나부끼는 ‘제2공항 절대반대’라는 노란 깃발을 보았을 때야, 비로소 이곳이 요즘 한창 뜨거운 마을이란 걸 새삼 깨닫는다.. 2023. 11. 21. 오영호 시조집 '농막일기'의 시조(8) ♧ 앓던 이가 빠진 듯 일요일 이른 아침 찾아온 문 선생 왈 어떤 시詩는 열 번을 읽어도 뭣을 노래했는지 알 수가 엇수다* 이럴 땐 어떵 햄수과?** 그냥 대껴붑서*** 하하하 무릎을 ‘탁’ 치며 앓던 이가 빠진 듯 --- * 없습니다 ** 어떻게 하십니까 *** 던져버리세요 ♧ 지아방* 꼭 닮앙 우리 강아지 왔구낭 공분 잘 햄시냐? 빙색이 웃는 손지** 얼굴 공부에 담 쌓구나 느 아방도 에큔가 지큔가 100은 넘었덴 해도 공부는 안ᄒᆞ곡 여기저기 ᄃᆞᆯ아만다니멍 ᄎᆞᆯ람생이*** 노릇만 했져 그 피가 어디 가느냐마는 아방 닮지 말앙 하는 체라도 해보라 허염시문 해진다 손자는 듣는 둥 마는 둥 핸드폰만 보고 있는 --- * 아버지 ** 손자 *** 남 앞에 나서기 좋아하는 사람. ♧ 물외 된장 냉국 조밭.. 2023. 11. 20. 월간 '우리詩' 11월호의 시(3) ♧ 세한도 - 송수권 먹붓을 들어 빈 공간에 선을 낸다 가지 끝 위로 치솟으며 몸놀림하는 까치 한 쌍 이 여백에서 폭발하는 울음…… 먹붓을 들어 빈 공간에 선을 낸다 고목나무 가지 끝 위에 까치집 하나 더 먼 저승의 하늘에서 폭발하는 울음…… 한 폭의 그림이 질화로같이 따습다. ♧ 이중섭의 소 - 이대흠 자신의 뿔로 들어가기 위해 소는 뒷다리를 뻗는다 서귀포에서 부산에서 뿔로 들어가 단단한 힘이 되어 세상의 고름을 터뜨리리. 소는 온몸을 뿔 쪽으로 민다 소의 근육을 따라 툭툭 햇살은 튕긴다 앞다리 들어 펄쩍 들어가고 싶다 소가 뛰면 뿔도 뛴다 젠장 명동에서 종로에서 뿔로 들어가고 싶은데 뿔은 또 저만치 앞서 있다 참을 수 없어 소는 속력을 낸다 뿔은 또 멀리 달아나고 뿔로 들어가고 싶어 소는, 나는 일생.. 2023. 11. 19. 이전 1 ··· 56 57 58 59 60 61 62 ··· 7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