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420 김정숙 시집 '섬의 레음은 수평선 아래 있다'에서(1) ♧ 자서 목젖 아래 가라앉아 있는 말입니다 뱃속에서부터 터득한 말입니다 북받칠 때 겨를 없을 때 불쑥불쑥 솟구치는 말들을 팽팽한 가을 수평선 위로 몇 자 올려 놓습니다 ♧ 문득 흰 바람이 불었는데 길 잃어야 한다면 딱 여기서 잃고 싶다 밟을까 꺾을까 아님 매달릴까 꽃샘이 날밤을 새워도 어쩌지 못한 민오름 아래 이끼 깔고 낙엽은 덮고 한뎃잠을 자다가 느, 피면 나도 피고 느, 돋으면 나도 돋아 눈에 눈 잎에 잎 맞추는 파르르르 바람꽃 ♧ 구순의 입덧 콩잎에 쿠싱한 멜젓 싸서 여름 넘기겠다 시고 생선 굽던 손가락은 핥기만 해도 베지근하다 시고 보말은 먹는 맛보다 잡는 맛 까는 맛이라 시고 빙떡은 ᄉᆞᆯ강ᄉᆞᆯ강 삶은 무채 맛이라 시고 찬바람엔 ᄐᆞ랑ᄐᆞ랑한 메밀 청묵 생각난다 시고 눈 오면 시든 고구마 삶아.. 2023. 11. 9. 나기철 시집 '담록빛 물방울'의 시(2) ♧ 그 집 난 아직 너무 모릅니다 어떻게 눈 뜨는지 마지막 별 어느 창에서 인사하는지 아침 밥상 어떤 반찬 만드는지 일층인지 이층인지 옷장 어디 있는지 책장 무슨 색인지 어떤 책들 꽂혀 있는지 돌아올 때 어떻게 문 여는지 활짝 여는지 살며시 여는지 잠들 때 어떤 이불 덮는지 눈 어떻게 감기는지 무슨 잠이길래 늘 상앗빛 목소린지 산호해변 눈빛인지 난 아직 너무 모릅니다 ♧ 사이 -이준관 시인께 제가 있던 학교에 ‘천국의 계단’이 있었습니다. 저는 어느 여선생과 몰래 그 계단을 넘어 소성당에 가기도 했습니다. 주위엔 녹나무 그늘, 때론 나리꽃, 백합도. 시집을 읽으며 거길 떠올립니다. 우리를 청정 아득하게 하는 거기, 너무 먼 거기를. ♧ 불 켜진 창 그제도 불이 안 켜져 있었다 어제도 불이 안 켜져 있었다.. 2023. 11. 8. 김영순 시집 '밥 먹고 더 울기로 했다'의 시(2) ♧ 발가락 군*의 소식을 듣다 서귀포 몽마르트르 솔동산길 오르다가 그저 비나 피할까 잠시 들른 이중섭 거처 일본서 당신의 부고가 손님처럼 와 있네요 수백여 통 남편의 편지, 그 편지 한 장 없어도 붓과 팔레트마저 미술관에 기증하고도 서귀포 피난살이가 그중 행복했다니요 돌아누우면 아이들 돌아누우면 당신 게들은 잠지를 잡고 아이들은 게를 잡고 오늘은 별 따러 가요 하늘 사다리 타고 가요 --- *이중섭 화가는 아내를 발가락이 길다고 ‘발가락 군’이라 불렀다. ♧ 순록의 태풍 바다도 바람나고 싶을 때 있나 보다 필리핀으로 일본으로 그리고 제주섬을 한바탕 외눈박이로 휘휘 저어놓는다 아무리 연약해도 무리 지으면 버텨낸다 순록도 그 중심에 새끼들 들여놓고 비잉빙 바깥을 돌며 여린 잠을 지켜낸다 아가야, 네 눈에는 .. 2023. 11. 7. 계간 '제주작가' 가을호의 시조(2) ♧ 이 친구란 말 - 조한일 형님, 동생 하다가 난데없이 친구 됐다 기분 좀 틀어졌다고 나이 차이 많이 나도 “이 친구, 정말 안 되겠네” 더 가까워진 우리 사이 ♧ 추사의 진눈깨비 3 - 한희정 -동지 무렵 갈필 닮은 추녀 끝에 어둠이 힘을 모으네 낫에 잘린 수선화 그 향기도 품에 넣어 한순간 비백을 친다 동짓밤이 가볍다 ♧ 시 할인 합니다 - 김영란 굳이 살건 없어도 에누리질 흥정질 습관처럼 손꼽으며 기다리는 오일장 넘치는 인심 속에서 골목은 더 환해진다 좌판 없이 맨 바닥에 비료포대 말아 꺾어 푸성귀 펼쳐 놓고 날 부르는 할망들 그 앞에 오종종 세운 봉지들은 무얼까 누런 박스 귀퉁이에 삐뚤빼뚤 작은 글씨 어디서부터 읽어야할까, 머뭇대는 그 사이 텃밭에 푸른 시들을 한 가득 내오신다 시금치시 고추시 .. 2023. 11. 6. 시집 '서러울수록 그리울수록 붉어지는'의 시(5) ♧ 개자리풀에도 노란 꽃은 피었습니다만, - 김정순 열 마지기 밭에 평생 골갱이로 일하며 풀만 뜯던 어머니는 그믐달처럼 쪼그라든 백 살 다리로 오늘도 마당 텃밭 가운데 옹크리고 앉아 있습니다 베체기, 생개, 소엥이, 난생이 익숙한 풀이름을 중얼거리며 말입니다 4․3 바람이 부는 날 나비처럼 아버지 따라나서지 못한 그날을 어머니 후회하셨잖아요 어머니 한숨은 골풀을 키웠고 골풀이 자라면서 눈가의 눈물은 질경이처럼 마당 가득 푸르렀어요 모란도 화려한 부용화도 멀리 산 너머 남촌에 있는 거라고 어머니는 나를 달래주셨어요 까맣게 흐르는 밤 철부지 비린내 나는 콩들은 언제쯤 어른이 될까 하면서요 흰 모래 위에서 필 때도 질 때도 요란함이 없는 번행초처럼 없는 듯 살라 하셨습니다 땅 위를 기면서 자라던 개자리풀에도 .. 2023. 11. 5. 오영호 시조집 '농막일기'에서(6) ♧ 중도 4 집착도 내려놓고 분별도 내려놓고 고행의 길이거나 향락의 길이거나 절대로 치우치지 말라 무소의 뿔처럼 가라 ♧ 중도 5 좌우를 거느리고 순리의 길을 따라 천둥 벼락 쳐도 유유히 흐르는 강처럼 자유의 깃발을 들고 멈춤 없이 가는 것 ♧ 알작지* 몽돌 그래 산다는 건 채이고 부딪는 것 울퉁불퉁 모난 삶을 눈물의 땀방울로 빚어낸 둥글고 단단한 까만 사리 반짝이는 초심을 잃지 않고 나만의 길을 찾아 썰․밀물 오갈 때마다 오욕을 닦아내는 몽돌들 차르르 차르르 노랫소리 정다운 --- *제주시 내도동 바닷가 ♧ 간수를 빼다 서해안 소금밭에 소곤대던 파도 소리 담고 온 포대 하나 창고에 자릴 잡고 3년간 면벽수행 중 섬 하나가 솟는다 쌓인 번뇌 망상 다 녹아 빠지는 날 한 소식消息 들으리라 내 몸을 살려주는.. 2023. 11. 4. 이전 1 ··· 59 60 61 62 63 64 65 ··· 7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