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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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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채성 시조집 '메께라'의 시조(7) ♧ 건천乾川     냇바닥에 귀를 대면 물소리가 울려온다   바람 타는 섬 에서는 울음 뵈지 말라시던   어머니 흐느낌 같은 숨죽인 당부도 같은   화산 밑 마그마처럼 마르지 않는 눈물샘   들불 다시 번질세라 정낭을 걸어 봐도   장맛비 큰물이 질 때 함께 목을 놓는다     ♧ 가시리*     그대 빈 들녘에도 사월의 산담이 있어 가시밭 한뎃길에 나를 두고 가시나이까 곶자왈, 곶자왈 같은 뙈기밭도 못 일군 채   조랑말 뒷발질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고 행기머체 찾아가는 갑마장길 오십 리에 따라비 따라비오름 바람만 우~ 따라오네   막으려고 쌓으셨나, 가두려고 두르셨나 긴 잣성 허물어도 해제 못한 옛 소개령 억세게 머리 센 억새 기다림은 끝이 없네   하늘빛이 깊을수록 그리움도 살찐.. 2024. 6. 1.
월간 '우리詩' 5월호의 시(6) ♧ 낙타 - 신경림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서 길동무 되어서.     ♧ 벽이 나를 만지기 시작했다 – 최경은       이삿짐을 싸다가 텅 빈 사무실 벽을 바라본다 긁히고 패인 울퉁불퉁해진 벽, 갈라진 벽에 칠이 벗겨져 알 수 없는 낙서들이 새겨 있었다     벽을 경계로 집기들이 가려진 밀폐된 공간 속에.. 2024. 5. 31.
김신자 시조집 '봄비에 썼던 문장은 돌아오지 않는다' 발간 ♧ 시인의 말   애틋한 밑줄 하나 못 그은 그런 오후엔 말도 시들고 글도 죽고 정신도 죽는다   미끄러지는 기억을 놓치지 않으려 나를 기다리는 모든 것들에게 풍경이 되어주던 것을 생각하니 알몸의 인어들이 봄으로 돋아났다 그래서 비비작작 시의 집을 지었다 단골집 하나 가진 듯 충분하다                                       2024년 봄에                                            김신자    ♧ 시작노트 1     나의 유년기는 주로 바다와 대화했다 내가 쓰는 어른의 말은 모두 바다로부터 온 것이며,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언어적 유산이다 나의 어휘와 문체는 어머니의 내면에서 발원했고 또한 용수리 바다에서 발원했다 분명 버려진 풍경이.. 2024. 5. 30.
김항신 시집 '연서戀書' 발간 ♧ 자서自序     아리고 아팠던 것들 심사숙고하여 61편의 졸시 세 번째 닻을 올린다.   자판기 선율 따라 무언의 손짓으로 안무를 하고 모노드라마 되어 무대에 올려질 때 묶어뒀던 활자들이 하르르 웃고 있다. 걸어온 발자취만큼 아팠을 인생살이   막이 내리면 공허감이 밀려온다. 그 공허함은 다시 무대를 향해 무언의 손짓을 한다. 아직 끝이 아님을….  -2024년 5월, 연서를 엮으며     ♧ 별풀꽃     풀벌레 초롱초롱 빛나는 별들의 고향 별나라 가면 어떤 세상 바라보며 고향 이룰까 저들처럼 나도 어느 꽃들과 외롭지 않은 별이고 싶어     ♧ 소나기     오늘처럼 빗물이 쏟아지는 날이었지   늦은 아침이었어 아마 아홉 살 단발머리 소녀가 소쿠리 옆에 끼고 호미 들고 아랫집 옥실이 .. 2024. 5. 29.
이양하 수필 '신록예찬(新綠禮讚)' ♧ 신록예찬(新綠禮讚) - 이양하       봄 · 여름 · 가을 · 겨울, 두루 사시(四時)를 두고 자연이 우리에게 내리는 혜택에는 제한이 없다. 그러나 그 중에도 그 혜택을 가장 풍성히 아낌없이 내리는 시절은 봄과 여름이요, 그 중에도 그 혜택이 가장 아름답게 나타나는 것은 봄, 봄 가운데도 만산(滿山)에 녹엽(綠葉)이 우거진 이 때일 것이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고 먼 산을 바라보라.     어린애의 웃음같이 깨끗하고 명랑한 5월의 하늘, 나날이 푸르러 가는 이 산 저 산, 나날이 새로운 경이(驚異)를 가져오는 이 언덕 저 언덕, 그리고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오는 맑고 향기로운 바람―우리가 비록 빈한하여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때 모든 것을 가진 듯하고, 우리의 마음이 비.. 2024. 5. 28.
월간 '우리詩' 5월호의 시(5) ♧ 꽃잠 - 강우현     배나무 그늘이었다 아버지를 배웅하고 돌아섰지만 떠나지 못했다 그늘이 전혀 다른 얼굴을 부릴 때도 한 발짝 움직일 수 없어 서성거렸다 끝자락이 당부인 양 밀어내도 짙은 그늘이 자라고 있었다 사람들은 달라진 게 없다 했고 하안 배꽃이 피면 그늘의 볼도 붉게 부풀기 시작했다 살다가 벽을 만나면 돌아가고 싶은 곳 홀로 기른 열매를 바라보며 배꽃보다 환하던 얼굴 배나무가 그늘을 꿰맬 때 꽃잠 속으로 갔다 열매가 여물어 하나씩 떠나고 그늘 더 짙어진 배밭 계절은 에누리 없이 흘러가고 빈 가슴으로 별똥별이 지나가던 날 아버지는 사선을 따라 배꽃이 되었다 슬픔도 기쁨도 차곡차곡 접어놓은 배 밭에는 호탕한 웃음소리 들리고 바람이 한 번씩 다녀가는 날 내 눈물의 관절에는 호우주의보가 내린다 봄.. 2024. 5.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