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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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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성 시집 '이어도공화국⑤ 우리들의 고향'의 시(4) ♧ 별빛과 불빛 하늘의 구멍가게 같은 십자가들 붉은 눈빛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파도처럼 서성거리고 있습니다 어린 나를 시장에 버려두고 몰래 지켜보던 눈빛이 보고 싶습니다 세상을 처음 배우던 시장에서도 늘 붉은 십자가로 빛나던 그 깊은 숲속 고아원에서도 나는 그렇게 어머니의 눈빛을 닮은 별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그 별을 닮은 불빛을 만들어 나무마다 매달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하늘의 별빛과 지상의 불빛 우리들은 이제 그렇게 늘 반짝이고 있습니다 ♧ 잃어버린 혀를 찾아서 너무 불순해진 혀를 잘라 숲속에 버려 버렸다 말랑말랑했던 혀가 굳어 누군가에게 면도날이 되었던 바로 그 혀를 잘라 숲속으로 던져버렸다 그 숲에서 새들이 날아오르고 혀 같은 단풍잎들이 바람에게 날리기 시작했다 혀는 없이 검붉은.. 2023. 11. 11.
월간 '우리詩' 11월호의 시(1)와 단풍 ♧ 외투 - 이송희 사내는 외투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여전히 몸 안에는 찬바람이 불었다 가로등 하나 없는 길, 멀어져간 숨소리 지나간 사랑은 고독과 변명뿐 사내의 외투 속에서 머물던 시간이 스르르 풀어지면서 옷깃을 파고들었다 구름이 빠른 속도로 골목을 빠져나갈 때 사내는 따뜻하게 허물어져 갔다 오래된 슬픔 하나를 몸 밖으로 내보내면서 ♧ 시험 성적서 – 옥빈 내 몸에 새겨진 말들은 믿음의 무게다 너를 기록하고 있는 나는 너다 네가 견뎌낸 한계치로 만들어 낸 능력이 숫자와 단위로 기록된 나는 너를 문장으로 풀어놓지 못했지만 너의 성적은 양호하다 문제가 없는 답을 내놓은 너는 문제가 없다 이름과 번호는 암호화 되었지만 해독이 가능하다 알아봐 달라는 소리다 눈여겨보아야 할 사양은 아프지 않게 해 달라는 메.. 2023. 11. 10.
김정숙 시집 '섬의 레음은 수평선 아래 있다'에서(1) ♧ 자서 목젖 아래 가라앉아 있는 말입니다 뱃속에서부터 터득한 말입니다 북받칠 때 겨를 없을 때 불쑥불쑥 솟구치는 말들을 팽팽한 가을 수평선 위로 몇 자 올려 놓습니다 ♧ 문득 흰 바람이 불었는데 길 잃어야 한다면 딱 여기서 잃고 싶다 밟을까 꺾을까 아님 매달릴까 꽃샘이 날밤을 새워도 어쩌지 못한 민오름 아래 이끼 깔고 낙엽은 덮고 한뎃잠을 자다가 느, 피면 나도 피고 느, 돋으면 나도 돋아 눈에 눈 잎에 잎 맞추는 파르르르 바람꽃 ♧ 구순의 입덧 콩잎에 쿠싱한 멜젓 싸서 여름 넘기겠다 시고 생선 굽던 손가락은 핥기만 해도 베지근하다 시고 보말은 먹는 맛보다 잡는 맛 까는 맛이라 시고 빙떡은 ᄉᆞᆯ강ᄉᆞᆯ강 삶은 무채 맛이라 시고 찬바람엔 ᄐᆞ랑ᄐᆞ랑한 메밀 청묵 생각난다 시고 눈 오면 시든 고구마 삶아.. 2023. 11. 9.
나기철 시집 '담록빛 물방울'의 시(2) ♧ 그 집 난 아직 너무 모릅니다 어떻게 눈 뜨는지 마지막 별 어느 창에서 인사하는지 아침 밥상 어떤 반찬 만드는지 일층인지 이층인지 옷장 어디 있는지 책장 무슨 색인지 어떤 책들 꽂혀 있는지 돌아올 때 어떻게 문 여는지 활짝 여는지 살며시 여는지 잠들 때 어떤 이불 덮는지 눈 어떻게 감기는지 무슨 잠이길래 늘 상앗빛 목소린지 산호해변 눈빛인지 난 아직 너무 모릅니다 ♧ 사이 -이준관 시인께 제가 있던 학교에 ‘천국의 계단’이 있었습니다. 저는 어느 여선생과 몰래 그 계단을 넘어 소성당에 가기도 했습니다. 주위엔 녹나무 그늘, 때론 나리꽃, 백합도. 시집을 읽으며 거길 떠올립니다. 우리를 청정 아득하게 하는 거기, 너무 먼 거기를. ♧ 불 켜진 창 그제도 불이 안 켜져 있었다 어제도 불이 안 켜져 있었다.. 2023. 11. 8.
김영순 시집 '밥 먹고 더 울기로 했다'의 시(2) ♧ 발가락 군*의 소식을 듣다 서귀포 몽마르트르 솔동산길 오르다가 그저 비나 피할까 잠시 들른 이중섭 거처 일본서 당신의 부고가 손님처럼 와 있네요 수백여 통 남편의 편지, 그 편지 한 장 없어도 붓과 팔레트마저 미술관에 기증하고도 서귀포 피난살이가 그중 행복했다니요 돌아누우면 아이들 돌아누우면 당신 게들은 잠지를 잡고 아이들은 게를 잡고 오늘은 별 따러 가요 하늘 사다리 타고 가요 --- *이중섭 화가는 아내를 발가락이 길다고 ‘발가락 군’이라 불렀다. ♧ 순록의 태풍 바다도 바람나고 싶을 때 있나 보다 필리핀으로 일본으로 그리고 제주섬을 한바탕 외눈박이로 휘휘 저어놓는다 아무리 연약해도 무리 지으면 버텨낸다 순록도 그 중심에 새끼들 들여놓고 비잉빙 바깥을 돌며 여린 잠을 지켜낸다 아가야, 네 눈에는 .. 2023. 11. 7.
계간 '제주작가' 가을호의 시조(2) ♧ 이 친구란 말 - 조한일 형님, 동생 하다가 난데없이 친구 됐다 기분 좀 틀어졌다고 나이 차이 많이 나도 “이 친구, 정말 안 되겠네” 더 가까워진 우리 사이 ♧ 추사의 진눈깨비 3 - 한희정 -동지 무렵 갈필 닮은 추녀 끝에 어둠이 힘을 모으네 낫에 잘린 수선화 그 향기도 품에 넣어 한순간 비백을 친다 동짓밤이 가볍다 ♧ 시 할인 합니다 - 김영란 굳이 살건 없어도 에누리질 흥정질 습관처럼 손꼽으며 기다리는 오일장 넘치는 인심 속에서 골목은 더 환해진다 좌판 없이 맨 바닥에 비료포대 말아 꺾어 푸성귀 펼쳐 놓고 날 부르는 할망들 그 앞에 오종종 세운 봉지들은 무얼까 누런 박스 귀퉁이에 삐뚤빼뚤 작은 글씨 어디서부터 읽어야할까, 머뭇대는 그 사이 텃밭에 푸른 시들을 한 가득 내오신다 시금치시 고추시 .. 2023. 11.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