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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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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채성 시조집 '메께라'의 시조(15) ♧ 표선   1.   만났네, 한 여인을 용궁올레 길목에서   섶 풀린 물소중이 높하늬에 나풀대며 볼우물 미소를 캐던 그는 분명 용녀 였네   곰살궂은 목소리엔 해조음이 묻어났네 귓바퀴에 찰박대는 물과 뭍의 이야기들 이어도 숨비소리에 내 심장은 뜨거워지고   맑디맑은 눈동자엔 수평선이 어리었네 깊이 모를 동공 속에 윤슬을 풀어놓고 밤에는 별을 끌어와 은하수로 수놓으며   먹보말 한 줌에도 배부르던 신접살이 초가지붕 낙숫물소리 꽃잠을 깨고 보면 수선화 노란 꽃망울 봄을 물고 있었네   2.   떠났네, 그해 사월 갈마파람 드세던 날   어질머리 물마루에 테왁만 남겨둔 채 간다고 아주 가리까, 물어볼 짬도 없이   남해용왕 부름 앞에 짧기만 했던 사랑 가슴에 .. 2024. 8. 9.
월간 '우리詩' 8월호의 시(1) ♧ 풀의 사상 - 김석규    뽑아내고 돌아서면 이내 돋아나 얼크러지는 풀 짓밟혀도 꺾이지 않고 금세 일어서는 끈질긴 힘 미친바람 몰아치는 앞엔 잠시 엎드릴 줄도 아는 처음부터 지켜 온 풀이야말로 튼튼한 임자였고 무너질 때마다 어깨 겯고 오는 거창한 힘이었고.     ♧ 풀꽃의 자세 - 우정연    풀꽃이 풀꽃끼리 의지하는 것은 서로 외로워서라고   아무리 건들거리며 사는 그들이라 해도 마음속에는 어엿한 생각들이 종종거리는데   속마음 꺼내어 살포시 펼쳐 바라보면 웅크려 우묵하고 가난한 가슴에 외로움보다 더 무거운 처절함이 두 주먹 웅숭그리고 있는데   치졸한 세상, 춥고 배고프면 그립고 외로울 틈 있기나 할까 바람 잔잔할 때 누울 자리도 생각나는 것이지   해바라기, .. 2024. 8. 8.
김신자 시조집 '봄비에 썼던 문장은 돌아오지 않는다'(9) ♧ 인동초    저수지 그 언저리 보리 베기 한창일 때   희노란 꽃잎 하나 꿀인 듯 쪽쪽 빨면   허기진 인동초 인생 목을 타고 넘었네   금은화 꽃이라서 그토록 좋아했나   장렬한 그 여름에 어머니 올 때까지   입안에 맴도는 단맛 기다림을 채웠네     ♧ 한 사람     오월엔   떠오르는   한 사람 이름 있데     달 보며 눈길을 머물게 한 사람, 비 내리는 걸 좋아하게 한 사람, 게으른 나에게 부지런함을 일깨워주고 깊이 있는 사람이 되게 한 사람, 허세와 꼰대로 가득 찬 세상에 겸손과 절제를 알게 한 사람, 뒤틀리고 구부러진 나를 고요하게 펴준 사람, 흔한 조팝나무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 사람, 처음으로 사랑 때문에 울게 하고 애틋함을 알게 한 사람, 마음.. 2024. 8. 7.
김항신 시집 '연서戀書'의 시(9) ♧ 빨강 구두    야무지게 도도했던 너와의 일탈   생각에 서성이다 떨구는 마음 년 알아   행복했던 그 때의 기억을     ♧ 남겨진 연서    추락한 것들은 말이 없다 아파도 아프지 않은 것처럼 기다릴 뿐 너희 잘못이 아니었던 것은 자명한 사실 어느 환희의 그루터기에 휩싸여 어긋나야 했었던 날들 비상을 바라는 것도 아닌 오로지 진실 앞의 응답이었을 뿐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것 돈으로 환산해야 한다는 것 그게 얼마로 환산해야 하는지는 각자의 ‘몫’이다   세상이 노래지는 아픔 속에 마음은 저리다고 분신이었던 잘못된 아리들 훨훨 날려주지 못해 안타까운 것들에 대한     ♧ 낭만 고양이    대문 입구에 곱지도 않은 낙엽들이 안으로만 휘날린다 .. 2024. 8. 6.
월간 '우리詩' 7월호의 시(8) ♧ 배롱나무 혀끝 – 임미리   기억을 지운 폐선로 위를 걷는다 한때는 석탄을 실어 날랐던 선로 이제는 세월을 뒤척이는 바람개비뿐 길 건너 붉어진 배롱나무 돌고 싶은 바람개비의 소원을 훔쳤을까 뒤안길에서 닫혀버린 문 열어 스민 볕에 물오른 염원이 돋아난다 배롱나무 혀끝에서 톡톡 꽃잎이 벙근다 증발한 것들의 녹록함을 안다는 듯 그 길 부끄럽게 어루만져 말랑거린다 멀어져 가는 위로 몇 잎을 핥는다 붉은 꽃잎 나비처럼 날아오른다     ♧ 이방인 시편 – 장성호    - 어떤 푸른 풀꽃    서초 고속도로변 오솔길 길가에서 얼굴이 얽은 한 남자가 잃어버린 시간을 돌려달라며 운다 그는 어릴 때 오로지 외할머니랑 지내면서 감기를 달고 살았고 천연두와 홍역까지 걸렸다 그는 길눈이 어두.. 2024. 8. 5.
'혜향문학' 2024 상반기호의 시(3) [초대시]  ♧ 꽃의 숨결 – 성희  산에서 안고 온 산국 한 다발 거실 창가에 앉혀놓고 볼 때마다 미안하다   줄 게 물밖에 없어 물만 갈아주는데 낯가림도 않고 유리잔 속발 담근 꽃 새소리 바람소리 들려주지 않아도 달뜬 숨 몰아쉬며 파르르르 꽃이파리 흔들며 향기 깝친다   몇 날 며칠 노랑 꽃등 밝히며 풀었다 머금는 넌 작은 몸 다 풀어 온 생, 향기로 몰아간다     ♧ 금산사 – 정하해   너를 찾으러 천리를 오니 눈물이 난다 영영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봐   구척장신인 미륵존불 앞에서 절 하나에 너를, 절 두 번에 또 너를   우리가 헤어진 것도 없으니 달리 찾을 방법도 없지만   법당 앞을 지키는 꽃무릇들과   오층 석탑에 올라서니 해가 기울고 있다.. 2024. 8.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