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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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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자 시조집 '봄비에 썼던 문장은 돌아오지 않는다'(6) ♧ 시작노트 2   시도 그렇다 현실의 내가 아등바등 일에 치여 모두 벗어던지고 싶을 때, 시가 나를 항해 손짓한다 나는 그 손을 한두 번은 뿌리친다 세상엔 복잡한 시보다 더 나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이 많다고 하지만 그것들을 느끼고 얼마의 시간을 보내고 온 나는 그 즐거운 것들이 이끄는 곳에서 내가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어떤 내 안의 무언가를 찾지 못하고 허우적대기만 했을 뿐이라는 걸시도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온 정성을 들이며 나를 달구며 두들겨야 한다 그래야만 시가 단단해진다       ♧ 썩은 시가 되고 싶다   간간이 다가들던 풋 생각 날로 익어 그 생각 썩고 썩어 내 시가 발효되면멍들어 아린 자국들 봄 햇살에 말리자   그러다 누군가의 지릿한 오줌 되고 그러다 누군가의 물컹한 똥.. 2024. 7. 4.
김항신 시집 '연서戀書'의 시(6) ♧ 살레칭 밧   원당봉 자락에 살레 살레 층이 있어 살레칭이라 했을까   둘레길 지나다 보니 원당사 절 아직도 가부좌 틀고 있네   어머니 일 가시고 나면 아버지 등에 동생이 있고 아버지 손에 내가 있을 때 울담 돌아 살레칭으로 참외 도둑 내모시던 아슴아슴 아리던 자리   아버지 상여 원당사 잠시 돌아 설기떡 층층 설상에 올리던공양주 아직 함께인 듯 눈에 아림은   궹이진 손 밧 늘리며 일용할 양식 조 보리 감저 심던 살레칭 밧 ᄎᆞᆷ웨 맛도 참 좋았는데     ♧ 연리지 사랑    아가야   얼마나 아팠을까 울음으로 경기하며 아프다고 할 때 아무것도 몰라서가 아닌 데 알아듣지 못했을까 철딱서니 없는 것들 부모의 무모한 행동으로 생, 내려놓으려 할 때 얼마나 힘들었을까   연리지 되어 우.. 2024. 7. 3.
강동완 시집 '외로움은 광부의 삽처럼 번들거리네'(11) ♧ 사랑을 장독대에 담고   오후의 햇살 속에서 다듬다듬 다듬거리는 다듬이 소리 들릴 때 그 다듬이 소리가 슬픈 눈꺼풀을 들어 올릴 때 오지 않을 것 같던 사랑이 요고 아낙네가 흘린 씨앗에서도 꽃이 피어났다   사랑을 담아두는 건 쉬운 일이지만 장독대의 푹 익은 고추장이나 된장처럼 매콤하거나 구수하게 익히기는 어려워   가끔 가슴 졸이며 내 마음의 장독대를 열고 새끼손가락 푹 찍어 맛을 보지만 비 온 뒤 내 사랑은 쓰다 햇살이 뼈마디를 부러뜨리면 뚝뚝뚝 비가 내린다 내 마음의 장독대에도 깊숙이 비가 내린다 어머니는 급히 뒤뜰에 열어진 장독대를 닫고 큼직한 널빤지와 돌을 얹혀 놓는다 난 장독대를 닫는 일을 지주 잊어버렸다 무엇보다 널빤지와 돌이 나에겐 너무 버거웠다   장독대는 바람이 잘 드는 곳에.. 2024. 7. 2.
임채성 시조집 '메께라'의 시조(11) ♧ 다섯 그루 팽나무   한날한시 온 마을이 제지내는 일월 북촌 비손하듯 씻김하듯 당팟당을 찾아간다 팽나무 다섯 그루가 신당 차린 작은 언덕   총소리 비명소리 나이테에 새긴 나무 화산도 불의 시간 피돌기로 재워가며 검은 돌 흉터 자국도 초록으로 감싸왔다   납작 엎던 서우봉에 붉덩물이 번질 때면 옹이마다 되살아나는 그 겨울의 환상통 숨죽인 흐느낌 같은 물소리도 들린다   봄 되면 일어서라 일어나서 증언하라   바다를 건넌 바람 귀엣말로 속삭일 때 규화석 껍질을 벗고 우듬지를 세운다     ♧ 엉또폭포   핏빛 동백 뚝뚝 지면 가슴은 늘 타들었다   눈물이 없어 눈물이 없어 더 쏟아낼 눈물이 없어   겉마른 사월 계곡에 몰래 뱉는 속울음   물허벅에 물이 비면 집도 절도 망한다고   그예.. 2024. 7. 1.
월간 '우리詩' 6월호의 시(6) ♧ ‘혀로 산’ 삶 – 임보   『혀로 쓴 시』는 김하일金夏日 시인의 시집 이름이다   일제 강점기 경북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13세에 아버지 따라 일본에 건너간 하일은 주경야독하며 근근이 버티며 지냈다 그러다 15세의 어린 나이에 문둥병에 걸려 즉시 요양원으로 강제 격리되었다   시력을 잃게 되자 점자를 익혔지만 손가락마저 기능을 잃어 혀로 점자를 읽었다 그리고 안타까운 그의 삶을 시에 담았다   그는 그렇게 혀로 80년을 살다 한 권의 시집을 남겨놓고 2023년 아흔여섯 해의 어둡고 고단한 한평생의 삶을 마감했다.     ♧ 봄에 핀 얼음꽃 - 여연   뽀드득뽀드득, 잠든 네가 틀니 가는 소리 이를 갈 때마다 이에서 눈가루가 날렸다 깊은 잠으로 들어간 너는 아직 한겨울 벚꽃이 피어도 못 .. 2024. 6. 30.
김순선 시집 '어느 토요일 오후'의 시(10) ♧ 하논 마르     -제주문화역사 나들이    병풍을 두른 듯바람도 비껴가는 포근한 옛길 논둑길 따라 논물이 재잘대는 아늑한 곳에 까까머리 이병 같은 벼 빈자리마다 파르스름하게 싹이 돋아 상큼하다   추수가 끝난 하논 마르에서는 새소리와 물소리에 흘러가는 구름 한 토막 뚝 잘라놓고 가을을 끓이고 있다   큼지막한 하논 대접에 가을 한 국자 퍼 담아서 베지근한 가을을 건네고 있다     ♧ 적송 위의 나부상     -제주작가 문학기행   전등사 성문에 들어서면 적송 몇 그루 성문 옆에서 풍경으로 스며드는 토성을 지키고 있다 멀찍이 나무 그늘에 앉아 적송을 바라보노라면 가지 끝에 여인이 보인다 도편수와 사랑에 빠졌던 주모가 돈에 눈이 멀어 도망갔다더니 언제 돌아왔는지 적송 위에 걸터앉아 솔잎 사이로 .. 2024. 6.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