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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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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제주작가' 가을호의 시조(1) ♧ 두가시* - 김영란 삼십 년 살았어도 모르는 게 더 많아 기 싸움 줄다리기도 승패가 나질 않아 후생엔 만나지 말자 용케 그 뜻 일치 하네 제주해협 건널 무렵 멀미가 심했는지 가시버시 오던 길에 버시만 떼어놓고 아득히 멀고도 가까운 두가시만 남았네 --- *부부의 제주어 ♧ 이파리들에게 - 김정숙 팔월 햇살 아래 눈부신 초록이여 삼중수소가 어젯밤 내린 안개 같은 거라고 헛소리 떠드는 숲속 젖은 길을 걸었다 한때의 아름다움은 네 몫이 아니란다 주어진 임기 동안 열매 맺고 씨 뿌리라고 꼭대기 볕 좋은 자리에 이파리 널 앉혔다 가을마다 너는 너를 증명해야 할 거야 바닷바람 벌써 시들어 마른 눈물 길어 올리고 어둡고 조용한 밤은 울긋불긋 떠돌 거야 ♧ 서대문형무소 곰솔 - 오영호 하늘의 높은 것을 어찌 모르려.. 2023. 10. 28.
구좌읍 평대리 '감수굴 밭담길' □ 천년의 숲 비자림과 당근마을 평대리      버스에서 평대리사무소 앞에 내렸을 때, 마을소개 안내판에는 ‘비자림과 당근’을 내세워 마을 자랑이 대단하다. 사무소 울타리에는 농악대들이 신나게 꽹과리를 두드리며 ‘평대 최고 당근’을 선전하는 그림이 도드라진다. 평대리(坪岱里)는 구좌읍의 중간쯤에 자리 잡은 마을인데, 마을 경계는 비자림 너머 돝오름 중간까지 걸쳐 있어 비자림로(1112)를 뼈대로 위아래로 길쭉한 모양이다.   평대리는 원래 ‘평평하고 너른 땅’이라고 해서 제주말로 ‘벵디’라 불러 왔으며, 마을은 동동인 ‘갯머리’, 중동인 ‘감수굴’, 서동인 ‘대수굴’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졌다. 요즘 관광시대를 맞아 남쪽의 비자림, 북쪽의 쉰모살해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든다고 자랑이다.     □ 감수굴 가까.. 2023. 10. 27.
양순진 디카 시집 '피어나다'의 시(3) ♧ 아버지의 물집 어릴 때 사다 준 크레파스로 당신의 손바닥 그렸습니다 찍히고 긁히고 갈라진 가뭄 밭 오름처럼 볼록이는 물집까지 지금쯤 터지고 납작해져 ♧ 이석증 숨긴다고 허물 가려지나 덧댄다고 흠집 숨겨지나 바람이 흔들리며 가듯 구름이 묵묵부답 떠가듯 하늘과 땅 지표로 버티면 되지 ♧ 사랑의 전령사 빼어난 자태 뜨거운 마음 잊을 수 없어 가을바람 편에 사뿐 당신을 사모합니다 ♧ 탐라의 노을 아직 꺼지지 않은 삼별초의 눈빛 이글거린다 넘어지며 고꾸라지며 넘던 저 능선, 오늘은 탐라의 후예가 쇳불 당긴다 ♧ 수장水葬 너도 한때는 물 바람 돌 틈에서 청춘 있었고 주인공이었겠지 지금은 특보랄 수도 없는 주검 물양귀비만이 조문객이구나 *양순진 디카 시집 『피어나다』 (책과나무, 2023)에서 *위 사진은 책의 .. 2023. 10. 26.
오영호 시조집 '농막일기'의 시조(5) ♧ 갠지스강 가트에 앉아 새벽 가트*에 앉아 흐르는 물을 보다 혼돈이 버무려진 답답한 나의 삶이 어머니 품 안에 든 듯 평온하고 고요하다 무엇을 더 보태고 무엇을 더 빼랴만 마시고 목욕하며 죄 씻는 사람들 삶에는 정답이 없듯 갠지스는 흐를 뿐 --- *돌계단 ♧ 끝이지요 깊은 산 토굴 앞에 매화꽃 흔들리는 날 큰 스님, 혹시 저를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소만. 그런데 이 누추한 곳까지 왜 오셨나요? 여쭤볼 말이 있어서요. 소승은 아무것도 아는 게 없습니다. 차나 한 잔 드시고 가시지요. 차향이 방안 가득 퍼질 때쯤 박새 한 마리 잔디마당에 내려앉아 지푸라기 톡 쪼아 물고 포르르 날아간다. 저도 오래전부터 황혼 길에 들었습니다. 이승을 떠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한참을 마당만 쳐다보.. 2023. 10. 25.
계간 제주작가 가을호의 시(2) ♧ 푸르름이 눈부신 – 김원욱 꽃잎 흐드러진 봄날 잠에서 깨어 내 안 광막한 천계를 들여다보다가 가파도 청보리밭 물굽이에 묻혀 꿈을 꾸던 먼 어둠의 끝자락 푸르름이 환한 그날처럼 그리워지고 출렁출렁 어우러져서 넘실대자고 살아 있으므로 눈이 부신 오늘 밤 나는 누구의 뒤란에서 일렁일까 ♧ 상사화 – 김항신 무릇, 이맘때면 당신이 서 있습니다 창을 열면 당신 모습 닿을 듯하다 까마득해서 내가 가면 그대는 떠나고 그대는 오고 창을 열면 꽃무릇, 당신은 없고 내가 그 곳에 서 있습니다 닿을 듯 보일 듯하다 일 년이면 빈자리에 모란(母蘭)이 동백이 그리움만 쌓입니다 ♧ 다이소에서 – 김혜연 -캐스트 어웨이(castaway)* 나의 윌슨, 오늘의 빈 오후가 결국 기억의 조류를 견디지 못해 난파되었어 내 소소한 오늘.. 2023. 10. 24.
구좌읍 월정리 '진빌레 밭담길' □ 흑룡만리, 제주밭담 흑룡만리(黑龍萬里). 제주밭담을 쌓아놓은 모습이 굽이굽이 검은 용이 꿈틀거리는 것 같다는 데서 생긴 말이다. 물론 중국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빗댄 표현이지만, 밭담 길이를 모두 합치면 만리장성을 넘어 약 2만 2000km에 이른다고 한다. 제주밭담은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독특해서 2013년 국가중요농어업유산으로 지정했고, 이듬해인 2014년에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가 선정한 세계중요농업유산(GIAHS)으로 등재되었다. 그러고 보면, 제주밭담은 1천년이 넘는 오랜 세월동안 선인들의 노력으로 한 덩이 한 덩이 손으로 쌓아올린 농업유산이다. 화산대지를 일구어 농사를 짓는 동안 나온 돌을 모아 쌓기 시작한 밭담은 바람을 걸러내고 토양유실과 우마의 침입을 막고, .. 2023. 10.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