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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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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문학' 가을호의 시조 ♧ 야생화 – 김수야 뒤덮인 고요 속에 바람조차 숨이 멎는 한 무더기 그리움 그 숲에 있었네 손길이 닿지 않아도 인연 또한 깊은지 가랑비 오기 전에 푸더덕 날으는 새 산자락 물들이네 반가운 안부 같은 넘나든 메아리 따라 터트리는 방울꽃 ♧ 눈빛이 들키는 거리 – 김수연 반나절 계곡 길을 더딘 걸음 걷다 보면 산까치 날아올라 흔들리는 구름 사이 주름진 빛살 겹겹이 포개지는 푸름 저 안 바위에 부딪치는 물소리가 끄는 대로 느긋한 발걸음을 떠미는 바람 따라 자잘한 붉은 꽃들이 터질 듯 떨려오고 축축한 숲 둘레에 물씬히 젖은 냄새 온몸을 들이미는 벌 나비처럼 보채고 가까이 눈을 맞추고 꼬드김 기다리며 ♧ 콩밭벌 전투 - 김종호 콩밭을 차지하러 몰려든 잡초군단 빽빽이 들어차서 인해전술 못지않아 곡괭이 움켜쥐고서 .. 2023. 10. 5.
오영호 시조집 '농막일기'의 시조(2) ♧ 세한도 여정을 읽다 별도봉 가는 길에 내 눈을 사로잡은 ‘세한도’ 다시 만난 추사秋史와 제주 우뚝 선 제주국립박물관 두루마리* 펼쳤다 모슬포 거센 바람 수선화 맑은 향기에도 스승의 눈빛마저 가물가물 저물어가고 대정골 가시울타리 안 외로움만 살찔 때 북경 길 발품 끝에 만난 귀하디 귀한 만학집晩學集, 대운산방문고大雲山房文藁,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 조선 땅 삼천리 가로질러 풍랑의 바다 건너 서책이 적거지에 들어온 봄날 오후 웅크린 자릴 털고 제자의 지극정성에 스승은 갈필을 세워 고마움을 그리다 메마른 벌판 위에 허술한 초가 하나 노송의 긴 가지가 꺾일 듯 뻗어 있고 벌판에 잣나무 두 그루 형제처럼 서 있는 툭 던진 한마디 말 ‘우선藕船**, 감상하게’ 권세와 이득에 물들지 않은 의리 절대로 변하지 말자.. 2023. 10. 4.
4.3 75주년 추념시집 '서러울수록 그리울수록 붉어지는'(2) ♧ 산지포* 앞바다 - 김광렬 배를 타고 나간 한 떼의 사람들이 손발 꽁꽁 묶인 또 한 떼의 사람들을 무슨 짐승처럼 물에 빠뜨려 수장했다 그날을 잊었는지 저 바다는 고요하다 허나, 속의 바다도 그럴 거라고 섣불리 속단하지 마라 바다는 지금 안으로 조용히 뒤채며 무섭게 흐느끼고 있는지 모른다 아주 오랜 옛날 한라산이 참고 참다 기어이 자신을 드러냈듯 누구나 안에 뜨거운 불을 지니고 있다 나는 이제 그 불을 잘 다스리고 진정으로 아끼는 사람을 절실히 사랑하고 싶다 --- *산지포 : 제주항의 옛 이름 ♧ 궨당 삼춘 – 강봉수 ᄇᆞ름 팡팡 부는디 어디 감수강? ᄀᆞ만 앚앙 시문 살아지커냐 낮인 노랑개가 밤인 검정개가 왕왕 지서가난 해안더레 가든 산더레 가든 오몽해사 살 거 아니가 게난 어드레 가젠마씀 아방 쉐.. 2023. 10. 3.
양순진 생태동시집 '반딧불이 놀이터'(2) ♧ 바람의 마을 세화는 바람의 길 나무 사이로 도도도 하늘 사이로 레레레 지붕 위로 미미미 하루종일 바람의 화음 ♧ 소리쟁이에게 배워 소리쟁이는 아프지도 않은가 봐 벌레들이 달려들어 제 몸 다 갉아 먹는데도 아무 소리 안 내잖아 나는 내 치킨 동생이 조금만 뺏어 먹어도 비명 지르는데 소리쟁이는 아깝지도 않은가 봐 다른 벌레들이 찾아와 겨우 남은 꽃대 갉아 먹어도 아까워하지 않잖아 나는 내 급식에 친구가 조금만 손대도 으앙 울어버리는데 ♧ 방울꽃 방울벌레 우는 가을이면 아무도 안 보이는 숲속 그늘 모여 살아요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이면 지고 말아 슬프지만 바람이 불면 또롱또롱 비가 오면 딸랑딸랑 좋다고 행복하다고 웃으며 살아요 ♧ 닭은 개보다 새다 웰시코기 똘똘이 매일 닭에게 진다 매일 아침 닭들이 우루루 .. 2023. 10. 2.
계간 '산림문학' 가을호의 시(2) ♧ 세모 네모 오 엑스 – 김혜천 초록색 연필로 세모 네모라고 쓰면 안개 피어오르는 프랑크푸르트의 창이 열리고 정령들이 나무와 나무 사이 환한 빛을 드리워 아침을 깨운다 서로를 축복하는 의식의 춤을 추면서 바람은 고요히 잠들고 태풍으로 찢긴 상처에 새 살이 돋는다 수정과 보완으로 윤기 흐르는 숲에는 작은 꽃들과 벌레들과 웃음들이 아이들과 함께 뒤논다 붉은색 연필로 오 엑스라고 쓰면 바람의 갈옷을 입은 타클라마칸 열사들이 달려와 물기란 물기는 모두 날려 초원은 사막이 되고 물 긷는 여인들의 타들어 가는 갈증과 낙타의 관절이 힘없이 꺾인다 이족과 저쪽을 가르고 맞다 틀리다로 금속성 기둥을 세워 총칼 부딪히는 소리 고막을 찢는다 대립의 역사로 사막에 뒹구는 주검의 잔해들 ♧ 수목원에서 - 임술랑 당신이 소나무.. 2023. 10. 1.
월간 '우리詩' 9월호의 시(3)와 애기도라지 ♧ 접는다는 것 – 여연 종이접기 하듯 마음을 접는다 네모난 종이 접어 둥근 공 만들 듯 겹 접고 홑 접어 당신을 소환한다 어느 쪽으로 접으면 당신이 될까 떠난 당신을 접으면 다른 당신이 올까 줄장미 늘어지던 오월 담장을 짚고 비틀거리다가 삶을 접었던 사람 머리에서도 장미가 붉게 피었지 삶을 접으면 무엇이 될까 나를 바라보던 눈을 접어 다른 생을 바라보던 당신도 종이처럼 접으면 둥글게 돌아올까 접는다는 것은 간절하다는 것 마음을 접는다는 것은 잊겠다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뜨겁게 타오르고 싶다는 것이다 ♧ 적요 – 정재원 나비 한 마리가 천일홍 마를 꽃 위에 팔랑거린다 햇살이 눈을 덥혀 놓은 것 밖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재의 순간, 흙에 묻어둔 얼굴을 누구도 찾지 않는다 꽃 한 가지 흔들릴 .. 2023. 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