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422 월간 '우리詩' 5월호의 시(3) ♧ 요다하다 – 이윤진 풍요롭고 많다 국어사전을 펼칠 때마다 생소한 단어들이 부지기수다 아름다운 언어의 맥은 부드러운 협곡을 만들고 생이 익어가는 것처럼 발견의 환희에 초로의 눈빛이 반짝인다 낱말의 협곡에서 모호함이 생길지라도 이해하고 진중해아 하는 것들은 그득하다 내가 사는 세상도 그러하다 ♧ 욕망을 태우다 - 이중동 근원을 알 수 없는 아궁이 하나가 내 몸속에 터를 잡고 있어요 커다란 주둥이를 가진 욕망의 아궁이 너무 뜨거워서 손을 댈 수가 없어요 날마다 아궁이를 품고 잠을 자고 출근을 하죠 나는 세상 모든 욕망을 위해 쉬지 않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요 당신의 피를 끓게 해 줄까요? 핏발선 두 눈 부릅뜨고 보세요 무지개 같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어요 그대는 나의 피를 .. 2024. 5. 22. 계간 '제주작가' 봄호의 시조(1) ♧ 아가미 호흡으로 - 김연미 부재중 전화가 떠도 너는 연락이 없었지 기억의 한 모퉁이 섬이 점점 작아지고 꽃 피고 눈이 내려도 멈춘 시간이었지 스팸메일 안부 같은 이름으로 남았을까 가장 높이 가장 멀리 가야 할 길은 멀고 이쯤서 되돌아갈까 너의 바다 속으로 안개 낀 교래 곶자왈 핑계처럼 길을 잃고 장맛비 그친 숲속 코끝까지 물이 차면 잊었던 아가미 호흡이 다시 편안해질까 골고사리 표주박이끼 수정이 된 바위수국 반가움과 낯섦이 갈등처럼 엉키는 사이 빙그레 미소를 짓는 네가 거기 있었다 ♧ 니들의 판결문 – 김영란 단 한 명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 했지 제주사람 300명 7년형 선고 받고 형무소에서 손꼽던 만기출소 꿈은 가고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에 누웠지 그 .. 2024. 5. 21. 월간 '우리詩' 5월호의 시(2) ♧ 그 보리밭 - 송준규 넓디넓은 구만리 청보리밭 출렁출렁 초록 파도 타고 풍력발전기는 유년의 흑백 영상 돌린다 보리등겨에 소다, 사카린 넣고 찐 새카만 보리개떡으로 태산같이 높고 험한 보릿고개 넘기고 보리밭 골 휘저으며 메추리알 줍고, 보리깜부기 구워 먹어 숯 검댕이 된 채 보리피리 불며 소 먹이러 가던 곳 멧비둘기 울어 대던 뒷동산엔 하안 찔레꽃 지천으로 피었었지 잘 익은 황금보리 베어 마당에 펼쳐 놓고 마주 서서 내리치는 리듬 맞춘 도리깨가 허공에 춤을 추는 타작마당 컬컬한 목을 타고 봇물처럼 시원하게 넘어가는 농주 한 사발에 낡은 울 아부지 보릿짚 모자에 웃음꽃 피고, 울 어메 삼베적삼 속 축 늘어진 젖가슴 덜렁이며 홍두깨로 칼국수 밀어 마당 한켠 가마솥에 보리 짚불로 삶아 내고, 잿불에 .. 2024. 5. 20. 김순선 시집 '어느 토요일 오후'의 시(6) ♧ 차나 마시게 -다소재 찻집에서 ‘경주’ 영화를 보고 예스러운 경주 풍경 속에 허름한 변두리 찻집 색바랜 창호지 문 너머 고즈넉한 처마 밑에서 들려오는 빗소리 7년 전 벽에 붙어있던 춘화를 떠올리며 차를 마신다 창문만 열면 눈앞에 펼쳐지는 능선 경주는 능선 따라 하루를 시작한다 삶과 죽음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오늘은 40대의 황차를 마신다 맑은 하늘처럼 깨끗한 부드러운 하늘을 마신다 욕망을 걸러낸한 모금의 차로 아름다운 능선과 같은 삶을 엿본다 근심과 불안을 걸러내며 편안함을 마신다 목마르지 않아도 지금 여기 와서 차나 한잔 마시게 ♧ 수레바퀴 -극단 파노가리의 ‘수레바퀴’ 연극을 보고 소녀는 웃고 있어요지긋지긋한 가난 때문에 돈이 없어서 절망하고 있어요 지나가.. 2024. 5. 19. 오승철 유고시집 '봄날만 잘도 간다'(1) ♧ 70리․1 떠날 거면 떠나라고서귀포는 있는 거다 비릿한 자리젓 냄새한 계절 삭고 나면 칠십 리약속의 땅에눈 감고도 올 것이다 ♧ 망장포 메꽃 이생망 이생망이라 함부로 말하지 마라 주지 스님 큰아버지 절터만 남은 마을 벼랑 끝 갯메꽃 하나 허공에서 피는 걸 봐라 ♧ 으름꽃 등 올리시네 신물질 발명했다는 물 건너 아들 목소리 그 말이 끝나자마자 으름꽃 등 올리시네 자배봉 뻐꾸기 소리 뻐꾹뻐꾹 등 올리시네 ♧ 한여름 저녁놀에 라면 끓이러 간 친구 곤냇골곤냇골의 친구 집 찾아가니 아, 글쎄 라면 먹자네순간 서녘 하늘 번지는 허기 창가에냄비 앉히고라면 끓길 기다리는 거다 ♧ 사진작가 용만이 형과 친구, 그리고 한라산․.. 2024. 5. 18. 계간 '제주작가' 봄호의 시(6) ♧ 박성내*의 밤 - 오광석 구름에 가린 달빛 근근하게 비추는 밤 박성내 옆길을 지날 때 소리가 들렸어요 뒤돌아보면 아무도 없는데 스윽스윽 끌며 따라오는 소리 발걸음 소리 크게 기자촌으로 급히 걸어도 누구 하나 내다보지 않는 이상한 밤 흐윽 소리에 뒤돌아보자 길옆 어두운 자리에 선 한 남자 아내도 아이도 잃고 홀로 배회하는 날들 구멍 뚫린 가슴에서 바람 소리 들려온 날들 돌아가고픈 조천리 집은 사라지고 없는지 돌고 돌아도 박성내 이 자리 헤매는 날들이 길어질수록 변해가는 자리 거멓게 사라져가는 날들 누군가 돌아보면 나 여기 있소 부르는데 돌아보는 이마다 부르르 떨며 도망치네붙잡고 넋두리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박성대 풀어헤쳐진 머리 핏기 스민 갈증이 무서워 오돌오돌 떠는데 고개 .. 2024. 5. 17. 이전 1 ··· 27 28 29 30 31 32 33 ··· 7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