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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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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채성 시조집 '메께라'의 시조(8) ♧ 산천단 곰솔   붉은 깃발 푸른 깃발 다 내린 오름 기슭   등 돌린 마을 향해 축문 외는 솔이 있다 바람결 혀짤배기소리 신음처럼 내뱉으며   누구를 위령하려고 하산 꿈을 접었을까   향기 없는 꽃만 피는 사월의 제단 앞에 지난 일 고해를 하듯 허리 살짝 굽힌 채   산지천 물길로도 끄지 못한 그날의 불길   타고 덴 자리마다 현무암 및 옹이가 돋아 그늘진 한라의 뒤꼍 보굿만 키웠던가   바늘잎 나란히 세워 비손하는 섬의 봄날   선 굵은 주름살을 나이테로 박제한 채 산천단 늙은 제관祭官들 제향을 또 준비한다     ♧ 다랑쉬 노을    봉분 같은 오름 사이 불기운이 번져간다   우두커니 홀로 남은 마을 표석 배경으로 못다 끈 가슴속 불길 저렇게라도 토하는지   타버린 집과 밭에 타.. 2024. 6. 8.
강동완 시집 '외로움은 광부의 삽처럼 번들거리네'(9) ♧ 나의 책속에는 책갈피가 없다       이홉짜리 소주병이 거친 눈발과 부딪치며 시멘트 바닥 위를 뒹굴고 있다     어머니는 돌담 뒤에 숨어 토끼눈처럼 끔벅거리며 차가운 눈물을 흘린다 그해 겨울날 엄마의 유일한 친구는 갈색 길고양이었다 갈색 길고양이를 품은 엄마는 온몸이 따뜻했다 문밖에는 슬픔과 따뜻한 계절에 대해 쓰여진 찢어진 책들이 날렸다 책    겉표지엔 감추고 싶은 우리들의 오랜 상처처럼 쥐 오줌이 얼룩져 있다   누군가 성급히 벗어 놓은 고무 슬리퍼가 배추 잎사귀처럼 마당에 버려져 있다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뒹굴던 소주병에 부딪쳐 주저앉는다   창틀에 끼여 반짝였다   단단한 구슬처럼 동생의 벌린 입속으로 굴러 간다 따뜻하게 녹여먹었다     아버지는 달빛이 비치면 늑대처럼 울.. 2024. 6. 7.
제69회 '현충일'에 부침 ♧ 감자꽃이 피었다 - 김종제   가칠봉 기슭의 펀치볼에 선혈 같은 감자꽃이 피었다   순교자의 흰 피를 보았으니 며칠 있다 저 꽃 지면 기적으로 생겨난 굵은 살점 같은 감자를 캘 수 있겠다   격전의 여름이 가기 전에 물 한 모금 없는 사막이라 목이 메이도록 눈물의 감자밥을 먹을 수 있겠다   유월의 전쟁에서 뼈도 찾지 못한 목숨들이 많아 감자꽃이 지천으로 피었다   땅 밑에 부둥켜안고 함께 드러누워버린 생(生)이여 팔을 뻗어 가까스로 손닿고 이름 부르고 간 명(命)이여 이 산하 곳곳이 폭탄 맞아 움푹 패인 감자를 닮았다   저 감자꽃이 순국의 종교가 아니라면 무엇이랴 성전의 경구가 아니라면 무엇이랴 주검 대신 얻은 저 핵의 알갱이 희생으로 일궈낸 저 골수 모난데 없이 둥글다   삶을 다 토해.. 2024. 6. 6.
김신자 시조집 '봄비에 썼던 문장은 돌아오지 않는다'(2) ♧ 숨빌락*       팔월엔 불어터진 생각이 둥둥 뜬다     헛디딘 순간마다 납작하게 붙어있는 군부를 떼어내다, 소금기 많은 과거가 하얗게 내 몸에 피어난다 뜨거운 태양의 역광으로 외로움도 씻겨내고 파도에 묵은 때를 벗기던 아홉 살의 여름, 그 여름을 품고 있던 아이들은 바다를 절부암에 가둬놓고 두 눈을 감은 채 연신 자맥질로 같은 숨만 호흡하며 누가 오래 버티나 내기하다, 불어터진 하루를 품고 귀가하던 그때처럼     바다에 가닿은 영혼, 도대불**이 되었다   ---* 숨빌락 : ‘아이들이 바다에서 자맥질하며 누가 오래 참는가를 견주는 놀이’의 제주어 ** 도대불 : 제주에만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옛 등대     ♧ 섬메섬메*     중심을 잡으라고 섬메섬메 어르네   세상도 내 마음.. 2024. 6. 5.
김항신 시집 '연서戀書'의 시(2) ♧ 항구의 연정 1   1. 연서   연분홍 우정 다지던 날 부푼 꿈 연락선 따라 도착한 항구의 도시 영도 물 내음 묻어나는 낯선 포구 해장국 냄새에 속을 달랜다   파리상회는 파리에서 공수한 차들로 주섬주섬 담아내다 말고 시원치 않으면 내려오라던 누이 따뜻한 차 한잔에 녹여보는 시간 그래도 그릴 수 없는 마음이라는 길 알기에 뭍 가시나 겁 없이 용기 무쌍하기는 하늘의 별도 따겠네   망망대해 던져진 몸 혼자 김 서방 찾아가는 마음 이런 거였어   달라붙은 사내놈 파출소 앞에 떼어 내고 삼십육계 지리던 진짜 이런 게 서울 김 서방 찾기였나   만나기 쉽지 않은 섬의 여자 여기도 산 저기도 산 바다도 없어 고향 생각 날 부를 때   우정으로 다지던 어느 날 연분홍 연서 바다에 날리며 충청도 가인.. 2024. 6. 4.
오승철 유고시집 '봄날만 잘도 간다'의 시(2) ♧ 비양도 항아리   가을 햇살에 잘 익은 그 할머니 그 항아리 왜 내가 갈 때마다 갖고 가라 했을까 그 옛날 황토돛배가 팔고 갔단 그 항아리   황포돛배 흘러가듯 어디로 다 흘렀을까 팔자 센 그 항아리 숨비소리 담가 놓고 어느 땅 그 역마살을 그리워나 했을라     ♧ 멩게 차   서귀포 가는 길에 쌍계암에 들렀습니다그냥 빌고 싶어 약속 없이 들렀습니다싸락눈 몇 방울 흘린 멩게 차도 받아듭니다   사오월 이 들녘에 멩게 꽃 안 핀다면그 누가 거린사슴에 기도 한번 올려 줄까요빠알간 열매에 대고 고백 한번 해 줄까요       ♧ 꿩꿩꿩   꿩아 너는 왜 우니나도 그걸 모르겠다   내 외로움 내 안다면덜 서럽지 않겠느냐   온 섬이 날 가둬놓고울어줘도 모르겠다     ♧ 꿩아, 그만 길을 비켜라   .. 2024. 6.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