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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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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형 시집 '천 개의 질문'의 시(5) ♧ 민들레처럼    아무데나 빗줄기가 스며드는 곳이면 보따리를 풀고 건조한 바람에 실려 온 고단한 몸을 부렸다 얼마나 깊이 내려가야 발이 닿을지 닫힌 문 앞에 마냥 서 있었다   관절마다 갈퀴 같은 옹이박이고 텅 빈 뱃속을 드러낸 팽나무가 속절없이 예각으로 기울 때에도 나 여기 끄떡없이 서 있었다   강물은 깊어 돌을 굴리지 못하고 온몸으로 쓰다듬고 지나가지만 왔던 길을 뒤 돌아보지 않는다   어스름 땅에 납작하게 붙어 도도하게 하늘 향해 주먹 내지를 때 뿌리는 묵묵히 깊은 우물물을 길었다   내 몸이 긴 그림자 비울 때   둥근 바람을 받아 날기 위해 깃을 팽팽하게 세우고 처음부터 나 여기 꿋꿋이 서 있었다     ♧ 위험한 집    새는 두 칸의 집을.. 2024. 9. 26.
월간 '우리詩' 9월호의 시(4)와 감 ♧ 여름밤, 여름비 - 김종욱    여름날, 여름빛   능소화가 지듯이 깨끗이 한꺼번에 져 버리는   날과 빛이 다 어제 같구나   그러나 마음에는 썼다   내겐 가장 달콤한 너의 웃음은   검은 것들이 반짝이기 시작하며   번뜩이는 어둠 속 고혹한 자맥질, 날카로운 비명의 수심, 애수의 박자와 선율은 비에 젖어 일어나지 못하는 나비, 빛, 어둠 사선으로 칼날을 세우는 잎사귀라는 소름 그 유한한 연주, 그리고 나의 춤 뒤집혀버려 빛나는 검푸른   여름비… 여름밤…   후두둑 두들기는 어둠의 리듬     ♧ 노동가 - 박태근     가자 가 오늘도 일하러 가자 밤새 그려 본 도면 뜯었다 붙였다 이리 갸우뚱 저리 갸우뚱 거치적거림 없이 착착 휘어감은.. 2024. 9. 25.
김항신 시집 '연서戀書'의 시(7) ♧ 그곳,   1.   그때는 몰랐지만 오늘은 알았다 고사리 찾던 노루손이길 금실 좋은 오〜 나기철 시인 머무는 곳   2.   평화공원 오가다 마주치는 길목   이곳에 오면 양로원이 있고 그 앞에 집과 차 한 대 농기구와 창가에 머무는 햇살과 바람 한 점이 주는 정오의 시간   3년째 기웃대다 커브를 돌리던 이곳엔 노루손이 따다 남은 벳고사리   그 쫄깃함에 젖이     ♧ 소리    궁금하다   어떤 울음으로 시를 지을까   여름에서 초가을까지 수컷들은 두 날개 비비며 암컷 부른다는데 얘들은 잠시 땅속 머물다 풀숲에 나와 날갯죽지 문장을 쓴다는데   소리들 베껴 쓴다 순서는 바뀌거나 말거나 살기 위해 먹기 위해 뛰기 위해 찢어지게.. 2024. 9. 24.
장영춘 시집 '달그락, 봄'의 시(9) ♧ 아프리카 펭귄    38도 땡볕 아래 어미 한번 아비 한 번   볼더스 비치 모래밭에 숙명이듯 알을 품는   어미의 붉은 목젖이 무릎을 꿇게 한다   울 엄마도 한여름에 나를 저리 품었었지   숨넘어가는 산통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세상의 첫 울음소리, 그 소리 때문이었지     ♧ 구피*의 하루    온종일 어항 속 태평양을 건너듯 출구 없는 레일 위를 돌리고 돌려도 또다시 제자리걸음 오늘이 갇혀 있다   한때는 내 어머니도 종종걸음치셨지 한여름 용천수에 발 한번 담글 새 없이 움푹 팬 발자국들은 어머니의 길이다   저들도 속수무책, 다람쥐 쳇바퀴 돌듯 저출산 막대그래프 눈금을 채워가듯 새끼들 한 달이 멀다, 수 싸움만 하고 있다   ---*구피 : 열대.. 2024. 9. 23.
김윤숙 시집 '저 파랑을 너에게 줄 것이다'의 시(6) ♧ 추정    뱃멀미 추자도는   가을 깊어 취한 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달라붙는 액젓 냄새   품에 어머니 체취, 걸러 담은 염분 같아   순순히 은빛 생애   온전한 독립은 없어   물맛도 밥맛도 한 모금 믹스커피도   한데 다 스며들라는 말씀   여기에 와 다시 듣네     ♧ 초희楚姬    산정호수 물빛에 얼비치는 그림자   조선의 탑 허물던 그이가 예 있는지   바람에 실리는 파랑 파도 소리 헛듣네   사라오름 한라돌쩌귀 땀에 젖는 초가을   발에 채는 잡풀 더미 마음 앞서 오른 건   한 자락 쳐올린 파도 받아 내린 문장들   에돌아 에돌아가 남김없이 펼쳐놓은   나침반 사람의 자리 눈부셔 글썽이는   홍단풍 오래 번지네 당신의 길이.. 2024. 9. 22.
월간 '우리詩' 9월호의 시(3)와 '흰진범' ♧ 물방울 시 – 김선순    언제 이런 나이가 되었나 더금더금 나도 몰랐다   보이지 않는 시간들이 보이지 않는 마음을 키우고   보이지 않게 자란 마음은 물방울만큼 새겨진 상처에 기대어 살아가는 법을 일러 주었다   무거워 헐떡이던 어제가 더 더 찬란을 꿈꾸는 내일이 선물처럼 펼쳐지는 오늘 앞에 침묵이다   달이 비치는 물방울 어둠으로 빛나는 찰나 어제가 되어가는 오늘을 눈부시게 내일이 찬란하게 오늘을 껴안는다     ♧ 자유에 대해 – 김세형   이 전쟁은 우와 좌의 전쟁이 아니다. 이 전쟁은 인간과 짐승과의 전쟁이다. 개인과 떼와의 전쟁이다. 당신은 고독한 그러나 자유한 인간이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떼로부터 탈출하라. 떼쓰는 떼로부터 벗어나 고독한 자신과.. 2024. 9.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