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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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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신 시집 '연서戀書'의 시(9) ♧ 빨강 구두    야무지게 도도했던 너와의 일탈   생각에 서성이다 떨구는 마음 년 알아   행복했던 그 때의 기억을     ♧ 남겨진 연서    추락한 것들은 말이 없다 아파도 아프지 않은 것처럼 기다릴 뿐 너희 잘못이 아니었던 것은 자명한 사실 어느 환희의 그루터기에 휩싸여 어긋나야 했었던 날들 비상을 바라는 것도 아닌 오로지 진실 앞의 응답이었을 뿐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것 돈으로 환산해야 한다는 것 그게 얼마로 환산해야 하는지는 각자의 ‘몫’이다   세상이 노래지는 아픔 속에 마음은 저리다고 분신이었던 잘못된 아리들 훨훨 날려주지 못해 안타까운 것들에 대한     ♧ 낭만 고양이    대문 입구에 곱지도 않은 낙엽들이 안으로만 휘날린다 .. 2024. 8. 6.
월간 '우리詩' 7월호의 시(8) ♧ 배롱나무 혀끝 – 임미리   기억을 지운 폐선로 위를 걷는다 한때는 석탄을 실어 날랐던 선로 이제는 세월을 뒤척이는 바람개비뿐 길 건너 붉어진 배롱나무 돌고 싶은 바람개비의 소원을 훔쳤을까 뒤안길에서 닫혀버린 문 열어 스민 볕에 물오른 염원이 돋아난다 배롱나무 혀끝에서 톡톡 꽃잎이 벙근다 증발한 것들의 녹록함을 안다는 듯 그 길 부끄럽게 어루만져 말랑거린다 멀어져 가는 위로 몇 잎을 핥는다 붉은 꽃잎 나비처럼 날아오른다     ♧ 이방인 시편 – 장성호    - 어떤 푸른 풀꽃    서초 고속도로변 오솔길 길가에서 얼굴이 얽은 한 남자가 잃어버린 시간을 돌려달라며 운다 그는 어릴 때 오로지 외할머니랑 지내면서 감기를 달고 살았고 천연두와 홍역까지 걸렸다 그는 길눈이 어두.. 2024. 8. 5.
'혜향문학' 2024 상반기호의 시(3) [초대시]  ♧ 꽃의 숨결 – 성희  산에서 안고 온 산국 한 다발 거실 창가에 앉혀놓고 볼 때마다 미안하다   줄 게 물밖에 없어 물만 갈아주는데 낯가림도 않고 유리잔 속발 담근 꽃 새소리 바람소리 들려주지 않아도 달뜬 숨 몰아쉬며 파르르르 꽃이파리 흔들며 향기 깝친다   몇 날 며칠 노랑 꽃등 밝히며 풀었다 머금는 넌 작은 몸 다 풀어 온 생, 향기로 몰아간다     ♧ 금산사 – 정하해   너를 찾으러 천리를 오니 눈물이 난다 영영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봐   구척장신인 미륵존불 앞에서 절 하나에 너를, 절 두 번에 또 너를   우리가 헤어진 것도 없으니 달리 찾을 방법도 없지만   법당 앞을 지키는 꽃무릇들과   오층 석탑에 올라서니 해가 기울고 있다.. 2024. 8. 4.
계간 '제주작가' 여름호의 시(3) ♧ 나눔 - 김순선    아직도 저곳을 드나드는 사람이 있을까 싶은 다 쓰러져가는 슬레이트 지붕 붙들고 마트와 편의점에 밀려 이름도 잊혀져가는 슈퍼 머리가 허연 파마머리 할머니가 덜컹거리는 문을 밀고 나온다 휘이훠이 손을 저으며 인근에 있던 수십 마리 비둘기들이 할머니 곁으로 몰려온다 지우뚱 지우뚱 쭈뼛쭈뼛 졸졸 투명 비닐봉지에 든 하안 쌀을 골고루 뿌려준다 밥은 먹언 다념시냐? 자식에게 말을 건네듯 비둘기의 아침이 걱정되어 쌀쌀한 이른 아침 마수도 하기 전에 비둘기 밥을 먼저 챙긴다 보릿고개를 건너온 할머니가 명절이나 제삿날에만 먹을 수 있었던 곤밥을 건넨다     ♧ 다랑쉬 비가(悲歌) - 김승립  달의 숨소리도 잠가야 했다   눈발 쏟아지고 한 줌 온기도 눈밭에 .. 2024. 8. 3.
김윤숙 시집 '저 파랑을 너에게 줄 것이다'의 시(2) ♧ 숲의 문장    수직의 은유로 빛을 내는 자작나무 숲   펼쳐놓은 페이지마다 어찌 뜻을 헤아릴까   바람길 파고들어도 해독되지 않는다   흰 뼈 갈고 갈아 써 내려간 고전의 문장   천 개의 햇살 타고 내게 닿은 당부 같아   겹겹이 퇴고의 흔적 가만 손을 대 본다     ♧ 사막의 별    온몸이 다트 되어 내리꽂던 별빛들   허르혁*에 체한 듯 아직도 삭지 않아   위벽을 타고 오른다 쓴물 같은 풀 냄새   ---*몽골의 전통 육류 찜 요리.     ♧ 자기 앞의 생    사막의 모래 능선   정상을   감히 넘봐   산등성 허리쯤에서 단숨에 미끄러지는   고배를 먼저 마신다   모호해진 생의 좌표     ♧ 당신이 걸어온 길    산 절벽 .. 2024. 8. 2.
장영춘 시집 '달그락, 봄'의 시(5) ♧ 그 사랑 어쩌라고    늦가을 길모퉁이 천진난만 들국화 누군가 떠올리다 향기로 전하고파   햇살도 저리 좋은 날 꺾어 둔 들꽃 송이   아차 하고 돌아서자 이미 때는 늦었지 하필이면 이 순간, 노란 꽃잎 만발한   한 번도 이루지 못한 그 사랑은 어쩌라고   누구에겐 사소하고 누구에겐 전부인 외마디 저항도 없이 무참히 쓰러져간   노랑도 그 진노랑이, 처연했던 가을아     ♧ 번아웃    무기력한 하루를 집게발로 물었다   우연히 게 몇 마리 식탁 위에 놨었지 밤새워 거품을 물고 냄비 밖을 꿈꾸던   참, 먼 길 돌아 예까지 왔었구나   구석진 내 방 안 고단한 다리를 펴고 턱 하니 참게 한 마리 미라처럼 누워 있는   산다는 건, 모험이야 암호.. 2024. 8.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