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417 장영춘 시집 '달그락, 봄'의 시(9) ♧ 아프리카 펭귄 38도 땡볕 아래 어미 한번 아비 한 번 볼더스 비치 모래밭에 숙명이듯 알을 품는 어미의 붉은 목젖이 무릎을 꿇게 한다 울 엄마도 한여름에 나를 저리 품었었지 숨넘어가는 산통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세상의 첫 울음소리, 그 소리 때문이었지 ♧ 구피*의 하루 온종일 어항 속 태평양을 건너듯 출구 없는 레일 위를 돌리고 돌려도 또다시 제자리걸음 오늘이 갇혀 있다 한때는 내 어머니도 종종걸음치셨지 한여름 용천수에 발 한번 담글 새 없이 움푹 팬 발자국들은 어머니의 길이다 저들도 속수무책, 다람쥐 쳇바퀴 돌듯 저출산 막대그래프 눈금을 채워가듯 새끼들 한 달이 멀다, 수 싸움만 하고 있다 ---*구피 : 열대.. 2024. 9. 23. 김윤숙 시집 '저 파랑을 너에게 줄 것이다'의 시(6) ♧ 추정 뱃멀미 추자도는 가을 깊어 취한 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달라붙는 액젓 냄새 품에 어머니 체취, 걸러 담은 염분 같아 순순히 은빛 생애 온전한 독립은 없어 물맛도 밥맛도 한 모금 믹스커피도 한데 다 스며들라는 말씀 여기에 와 다시 듣네 ♧ 초희楚姬 산정호수 물빛에 얼비치는 그림자 조선의 탑 허물던 그이가 예 있는지 바람에 실리는 파랑 파도 소리 헛듣네 사라오름 한라돌쩌귀 땀에 젖는 초가을 발에 채는 잡풀 더미 마음 앞서 오른 건 한 자락 쳐올린 파도 받아 내린 문장들 에돌아 에돌아가 남김없이 펼쳐놓은 나침반 사람의 자리 눈부셔 글썽이는 홍단풍 오래 번지네 당신의 길이.. 2024. 9. 22. 월간 '우리詩' 9월호의 시(3)와 '흰진범' ♧ 물방울 시 – 김선순 언제 이런 나이가 되었나 더금더금 나도 몰랐다 보이지 않는 시간들이 보이지 않는 마음을 키우고 보이지 않게 자란 마음은 물방울만큼 새겨진 상처에 기대어 살아가는 법을 일러 주었다 무거워 헐떡이던 어제가 더 더 찬란을 꿈꾸는 내일이 선물처럼 펼쳐지는 오늘 앞에 침묵이다 달이 비치는 물방울 어둠으로 빛나는 찰나 어제가 되어가는 오늘을 눈부시게 내일이 찬란하게 오늘을 껴안는다 ♧ 자유에 대해 – 김세형 이 전쟁은 우와 좌의 전쟁이 아니다. 이 전쟁은 인간과 짐승과의 전쟁이다. 개인과 떼와의 전쟁이다. 당신은 고독한 그러나 자유한 인간이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떼로부터 탈출하라. 떼쓰는 떼로부터 벗어나 고독한 자신과.. 2024. 9. 21. 계간 '제주작가' 여름호의 시(7) ♧ 사막 여행 – 김병택 햇빛이 작열하는 날에야 소원대로 사막을 길을 수 있었다 사막은 거친 바람으로 가득했다 여행 전에 머리에 떠올렸던, 무지개가 뜨고 미풍이 불며 길가에 야생화들이 웃고 있는 사막은 천국에서나 있을 법했다 쉬지 않고 부는 바람은 멈출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우리를 더욱 막막하게 한 것은 가야 할 방향을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였다 오아시스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곳이 존재하는 건 확실했지만 거기엔 번들번들한 샘물과 샘물을 둘러싼 주변에 지친 모습으로 서 있는 몇 그루 나무가 고작이었다 거듭 쌓이는 피로가 륙색 안의 곳곳에까지 스며든 것을 무게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 한가운데로 몰려들었다 이 국면을 벗어날 방안이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결국, 우리는 .. 2024. 9. 20. 조직형 시집 '천 개의 질문'의 시(4)와 나무 ♧ 천 개의 질문 오후의 역광으로 찍는 뷰파인더 속 나무 한 그루 시커먼 실루엣으로 하늘을 떠받친 채 무섭게 서 있다 천 년을 넘게 산 은행나무 거대한 나무 밑에 서서 고개를 꺾어 하늘같은 꼭대기를 쳐다본다 나무의 끝을 알 수가 없다 세상일이 안과 밖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면서 부동의 자세로 대웅전을 바라보는 나무 저 가지 어딘가에 붙었던 나뭇잎으로 수많은 인연이 겹을 만든다 아직 이루지 못한, 가지에 매달고 있는 천 개의 질문 천 개의 눈이 있고 천 개의 귀가 있어 천 년을 산다는 것은 나무 하나만의 목숨은 아닐 것이다 그에 일 할도 안 되는 목숨으로 그를 엿보는 것 같아 가슴이 쿵쿵거린다 나는 아득한 나무 앞에서 너무 높게 .. 2024. 9. 19. 김신자 시조집 '봄비에 썼던 문장은 돌아오지 않는다'(완) ♧ 까마중 도두봉 갔다 오다 잠시 멈춘 걸음에 까맣게 익은 아이 날 보며 웃고 있데 잡힐 듯 말 듯한 시절 아련히 다가왔네 까마중, 얼마나 순도 높은 빛깔이었나 목마름 깊을수록 최대치로 끌어 모아 한입에 밀어 넘기면 배냇짓처럼 얹힌 단물 ♧ 고봉밥 아들 밥 뜰 때마다 그 말씀 생각난다 사람은 밥심으로 살아가는 거라며 사발꽃* 수북이 피듯 고봉밥 떠 주셨지 비수로 꽂힌 말도 누르면 지나는 것 쉰다섯 혹은 여섯 내 삶의 급커브길 꾸욱꾹 눌러 담아야지 세상 실은 고봉밥 --- * 사발꽃 : ‘수국’의 제주어. ♧ 부끄럽다 당산봉 아버지 산소 옆에서 늘 지키는 등 굽은 소나무에게 .. 2024. 9. 18. 이전 1 ··· 6 7 8 9 10 11 12 ··· 7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