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417 오승철 유고시집 '봄날만 잘도 간다'의 시조(5) ♧ 섶섬 Ⅰ 성산에서 놓친 해를 서귀포서 다시 본다 내 마음 칠십리는 언제나 빈 포구인데 한 줄기 뱃길 끝에서 표류하는 섬이여 Ⅱ 보목동 산 1번지 섶섬 해돋이야 수천 년 늙은 바위에 홍귤 꽃도 피워내고 수난의 바다 곁에서 파초일엽 키웠지 Ⅲ 이제는 지워야 하리 이마에 걸린 수평선 매달 음력 초사흘과 여드렛날은 용이 되게 해달라고 빌던 구렁이 용왕의 야광주를 찾지 못해 백 년을 바닷속만 헤매다 죽었다지만, 아침놀 번진 칠십리 전설보다 슬퍼라 ♧ 비양도(飛陽島) 바다는 내 생활 유배지 아침 6시출어하면우도 끝에가시처럼 돋아 있는 불빛들 썰물 때는 한 줄기 길사발꽃이나 피우다가밀물 녘에야 비로소 섬이 되는 비양도 바다의 눈발이 더하면새미야.. 2024. 6. 28. 장영춘 시집 '달그락, 봄'의 시(2) ♧ 해후 너를 보낸 시간 앞에 늘 목이 마르다허기진 기억들이 봄이면 꿈틀꿈틀하늘로 올려본 날이몇 날 며칠이던가 그리움의 끝자리엔 회색빛만 감돌다혹독한 겨울 지나 붓끝을 세우다 말고산목련 꽃 문을 열며 그렇게 너는 왔다 사나흘 마주 보다, 막막하고 막막한 채아무 말 못하고 선 네 몸짓을 보았다서로의 눈빛만으로도뭉클하고 뭉클해진 ♧ 산 목련 겨울의 꽃눈을 달고 그녀는 내게로 왔다 오랜 불임의 시간 탯줄을 자르고 이제 막 배냇저고리 가지 끝에 걸렸다 ♧ 그 여름 있는 듯 없는 듯이 없이 살자 그랬지 세상 밖 소리조차 자물쇠를 채워놓고 뜨겁게 달궈진 방 내가 나를 가둔다 그렇게 사흘 나흘, 그 여름 다가도록 꽃 대궁만 올리다 상사화 꽃 진.. 2024. 6. 27. 월간 '우리詩' 6월호의 시(5) ♧ 초록 – 김은옥 육덕 좋은 저 햇살 나무마다 꽃마다 마구마구 몸 치대더니 봄날을 초록으로 가득 채워 놓았군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어느 밤 별똥별 하나가 나를 관통해 왔지 예고도 없이 내 몸에 깊은 구멍을 만들어 놓더군 불의 제단에 던져진 느낌이었지 마지막이듯 거대한 초록을 망막에 비취 보는데 별똥별 앞 다투어 꽃피우는데 초록도 구멍 같이 타오르는 어둠이더군 ♧ 평형수 - 김정원 배가 무거운 짐을 싣고 높은 물살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는 일 왼쪽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일 목적지를 향한 속도와 방향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엎어지지 않는 일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흔들려도, 기울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기울려도, 중심을 잃지 않고 다시 똑바로 서.. 2024. 6. 26. 김신자 시조집 '봄비에 썼던 문장은 돌아오지 않는다'(5) ♧ ᄆᆞᆷ* 바닷속 10미터가 그녀의 길이었다 바다의 시간들은 돌고 돌아 흐르고 줄타기 곡예 하듯이 헛물켠 몸 하나로 어머닌 ᄆᆞᆷ이었다 갈조류 ᄆᆞᆷ이었다 숨 가쁜 깊이에서 회이로 베어내면 볶아낸 콩 한 줌으로 버무려진 ᄆᆞᆷ이었다 꽃피는 일은 없어 ᄆᆞᆷ을 말아 걸었네 차귀도 서쪽 마다 가젱이 물살 가르며 끝까지 움켜쥔 것은 자식 같은 실타래 ---* ᄆᆞᆷ : ‘모자반’의 제주어. ♧ 어머니는 걸었네 배운 게 하나 없어 놀 줄도 몰랐었지 책 읽기 영화 보기 남의 나라 얘기지 한 가지 소일거리는 천천하게 걷는 일 돈 한 푼 아끼려고 걷는가도 싶었고 당신의 건강 위해 걷는 줄 알았는데 집 밖을 나와 결으면 오장이 시원타 했네 하기야, 스트레스 풀 곳도 있어야지 .. 2024. 6. 25. 김항신 시집 '연서戀書'의 시(5) ♧ 처서 참더웠다 소슬바람 다가서려다 때가 아닌 듯 물러설 줄 모르는 발악은 바닥을 쓴다 모처럼 귀뚜리 요란하다 마당에도 별도에도 정화되는 새벽은 나를 깨운다 계절은 이렇게 살아25도 차로 걸어오는 사봉 길 다시 못 올 것 같던 인생길에 나를 반추한다 ♧ 마지막 탐방길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꾸역꾸역 등짐 나르던 때 있었다 아버지 상엿소리 듣던 어린 날 등심은 땀에서 눈물샘으로 후볐다 양 날개 지탱하기 위한 등뼈들이 짊어진 조코고리* 무게에 땅심은 ㄱ역자를 만든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엄마오리 새끼 오리 뒤뚱뒤뚱 열 걸음 다섯 걸음 어미는 새끼 바라보며 뒤에서 관찰하는데 도저히 견딜 수 없던 인내는 양심을 팔아 “아저씨 등짐 같이 실어다 주세.. 2024. 6. 24. 임채성 시조집 '메께라'의 시조(10) ♧ 북받친밭 도랑물 해자를 두른 절벽 위 분지에서 훈련 잘된 초병 같은 청미래덩굴을 보네 전쟁이 끝났단 소식 아직 듣지 못한 걸까 사기그릇 조각들이 풀숲에 몸을 숨기고 사람의 자취마저 땅에 묻힌 산속 빈터 무너진 움막 돌담만 옛 한때를 증언하네 바람조차 들지 않는 이 깊은 숲에 들어 단 한 번 열매 맺고 말라 죽는 조릿대처럼 결연히 목숨과 바꾼 낡삭은 깃발 하나 온대성 초목들이 지난 상처 기워가고 선불 맞은 자리마다 초록 도장 찍는 시월 봄볕에 몸을 푼 섬이 말문을 트고 있네 ♧ 영하의 여름 주인 잃은 초집 몇 채 불에 탄 그날 이후 마을 안길 올레마다 금줄이 내걸렸다 까마귀 울음소리가 총소리에 묻혔다 돋을볕 등에 지고 군인들이 다녀가면 어.. 2024. 6. 23. 이전 1 ··· 20 21 22 23 24 25 26 ··· 7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