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420 김신자 시조집 '봄비에 썼던 문장은 돌아오지 않는다'(5) ♧ ᄆᆞᆷ* 바닷속 10미터가 그녀의 길이었다 바다의 시간들은 돌고 돌아 흐르고 줄타기 곡예 하듯이 헛물켠 몸 하나로 어머닌 ᄆᆞᆷ이었다 갈조류 ᄆᆞᆷ이었다 숨 가쁜 깊이에서 회이로 베어내면 볶아낸 콩 한 줌으로 버무려진 ᄆᆞᆷ이었다 꽃피는 일은 없어 ᄆᆞᆷ을 말아 걸었네 차귀도 서쪽 마다 가젱이 물살 가르며 끝까지 움켜쥔 것은 자식 같은 실타래 ---* ᄆᆞᆷ : ‘모자반’의 제주어. ♧ 어머니는 걸었네 배운 게 하나 없어 놀 줄도 몰랐었지 책 읽기 영화 보기 남의 나라 얘기지 한 가지 소일거리는 천천하게 걷는 일 돈 한 푼 아끼려고 걷는가도 싶었고 당신의 건강 위해 걷는 줄 알았는데 집 밖을 나와 결으면 오장이 시원타 했네 하기야, 스트레스 풀 곳도 있어야지 .. 2024. 6. 25. 김항신 시집 '연서戀書'의 시(5) ♧ 처서 참더웠다 소슬바람 다가서려다 때가 아닌 듯 물러설 줄 모르는 발악은 바닥을 쓴다 모처럼 귀뚜리 요란하다 마당에도 별도에도 정화되는 새벽은 나를 깨운다 계절은 이렇게 살아25도 차로 걸어오는 사봉 길 다시 못 올 것 같던 인생길에 나를 반추한다 ♧ 마지막 탐방길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꾸역꾸역 등짐 나르던 때 있었다 아버지 상엿소리 듣던 어린 날 등심은 땀에서 눈물샘으로 후볐다 양 날개 지탱하기 위한 등뼈들이 짊어진 조코고리* 무게에 땅심은 ㄱ역자를 만든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엄마오리 새끼 오리 뒤뚱뒤뚱 열 걸음 다섯 걸음 어미는 새끼 바라보며 뒤에서 관찰하는데 도저히 견딜 수 없던 인내는 양심을 팔아 “아저씨 등짐 같이 실어다 주세.. 2024. 6. 24. 임채성 시조집 '메께라'의 시조(10) ♧ 북받친밭 도랑물 해자를 두른 절벽 위 분지에서 훈련 잘된 초병 같은 청미래덩굴을 보네 전쟁이 끝났단 소식 아직 듣지 못한 걸까 사기그릇 조각들이 풀숲에 몸을 숨기고 사람의 자취마저 땅에 묻힌 산속 빈터 무너진 움막 돌담만 옛 한때를 증언하네 바람조차 들지 않는 이 깊은 숲에 들어 단 한 번 열매 맺고 말라 죽는 조릿대처럼 결연히 목숨과 바꾼 낡삭은 깃발 하나 온대성 초목들이 지난 상처 기워가고 선불 맞은 자리마다 초록 도장 찍는 시월 봄볕에 몸을 푼 섬이 말문을 트고 있네 ♧ 영하의 여름 주인 잃은 초집 몇 채 불에 탄 그날 이후 마을 안길 올레마다 금줄이 내걸렸다 까마귀 울음소리가 총소리에 묻혔다 돋을볕 등에 지고 군인들이 다녀가면 어.. 2024. 6. 23. 월간 '우리詩' 6월호의 시(4) ♧ 사월 겹벚꽃 사월이 붉다 연인의 보조개 웃음이 꽃나무 아래서 눈부시게 머물고 침잠한 꽃 아래 조용한 영원의 생명이 꿈틀거리는 뿌리 다채롭고 신비한 시간이 날개를 펼치고 꽃봉오리마다 부드러운 숨결을 내쉰다 멀리 떨어져 나가더라도 아기처럼 순수한 마음이 펼쳐지고 가지 끝마다 피워 낸 꽃봉오리 경이로운 시간은 멈추지 않아 사라지지 않아 나른한 햇살에 꽃잎이 시들고 우리의 시간이 흐릿해지면 나무도 조금씩 나이를 잊어 가리 시간이 쇠잔하여 사라지더라도 너의 미소는 사월이면벚꽃잎으로 붉게 피어나리 무수한 겹벚꽃 무리 무수히 반짝이는 웃음들 꽃 아래 노인이 소년처럼 붉다 아이가 춤추며 꽃 사이로 뛰어가고 여자가 붉은 숲길을 사뿐히 날개 치며 걸어간다 ♧ 투명인 – 김나.. 2024. 6. 22. 김순선 시집 '어느 토요일 오후'의 시(9) ♧ 사랑의 노예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를 보고 달콤한 아리아의 선율에서 꿀이 뚝뚝 떨어진다 암사자 같은 데릴라의 관능적 애무로 삼손의 마음을 옴짝달싹 못 하게 묶어버렸다 원시의 동굴 속으로 유인하듯 이방 여인의 치마폭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삼손 하나님을 배신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힘의 비밀을 데릴라의 사랑과 바꿔버렸다 하늘에서 천둥소리 들린다 하나님의 능력이 떠난 삼소은 허수아비 되어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두 눈마저 빼앗겼다 사랑의 노예가 되어 그들의 조롱 속에 연자방아를 돌리는 비참한 삼손의 모습억장이 무너진다 ♧ 봄의 제전 -발레 ‘봄의 제전’을 보고 봄의 맥박이 요동친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숨 가쁘게 달려온 기적 소리 들린다 얻음 사이로 고개를 내미는 복수초같이 긴긴 .. 2024. 6. 21. 장영춘 시집 '달그락, 봄' 발간 ♧ 시인의 말 중산간 길을 걷다가 안개에 갇혔다 숨 가쁘게 걸어왔던 길들도 모두 지워지고 덩그러니 중심을 잃고 미로에 선 나 어디로 가야 하나? 뒤를 돌아봤지만 아직도 길은 보이지 않는다 안개가 걷히길 기다리며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 봄, 엿보다 바람처럼 왔다가 사나흘 살더라도 피우리라. 피우리라 물관으로 실어나른 저 것 봐 바람꽃 한 송이 얼린 손 내미는 거 어제 놓아버린 핏줄 마른 다짐들이 또다시 꽃 앞에서 속수무책 무너지고 게으른 발자국 털며 출렁이며 오는 봄 ♧ 연두의 시간 또르르 말린 햇살 연두의 시간이네 초롱초롱 눈뜬 도시 새싹들의 시간이네 덧칠에 덧칠한 길들어제가 달려오네 구름과 바람 사이 산과 들을 건너온 포개고 또 포개져 오는 넌.. 2024. 6. 20. 이전 1 ··· 21 22 23 24 25 26 27 ··· 70 다음